2000년 작성했던 글입니다. 14년이 지났으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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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醫師들을 움직이고 있는가? >


두 차례의 의료폐업사태를 겪으면서, 정부와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것은 분노와 당혹감이다. 분노가 의사들의 폐업이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유발된 것이라면, 당혹감은 지금까지 어떠한 다른 직종 종사자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의사라는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없을 만큼 다른 일을 하고 다른 대우를 받으며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의사들의 결집력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의사들이 한 목소리로 정부를 성토하고, 쏟아질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며 폐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게 하였는지 그 원인에 대해 이야기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돈 때문이 아닌가?' 하며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를 못 마땅해 하고 있다. 의약분업으로 음성적인 수입이 줄어 수입이 줄 게 되니 '돈 더 달라'고 아우성이라는 것이다. 의사들은 일반인의 인식에 오랫동안 돈 많고 거만한 기득권층으로 인식되어 왔기에 이러한 방향으로 의사들의 폐업 이유를 이해하고 풀어가려는 정부의 태도는 의사에 대한 여론만을 더욱 악화시켜 일반 국민들이 '진실'을 알 기회조차 뺏고 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들도 돈을 많이 벌어 잘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의약분업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의사들까지 현 의료현실과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면 '돈'이 아닌 다른 근본적인 動因이 의사들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현재 언론의 태도는 현 사태를 '漢藥分爭'과 유사한 '醫藥分爭'수준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폐업을 주도하고 있는 전공의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정부에 의해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된 이후 지난 20년 동안 의사들은 왜곡되고 자유롭지 못한 비민주적 의료현실에서 살아남기에만 급급했다. 정부에서도 인정한 바 있는 원가의 80%에도 못 미치는 의료수가를 보전하기 위해 의료서비스의 향상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환자를 보는데 치중했고, 의사가 가장 인정받아야할 기술료인 진찰료가 무시당하면 약을 통해 손실을 보전했다.

민주적 시장경제의 원리도, 의료전문인의 의견도 완전히 무시된 채 정치 논리에 따라 비전문인인 행정직 공무원과 그를 이용하려는 로비단체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온 지난 20년간의 의료복지정책 앞에서 말없이 당하기만 했던 이 나라의 의사들은 그저 도둑놈이라는 오명에도 밥 굶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이유하나로 변명 한마디 못하고 숨죽이고 살아왔다.

 

1) 의료계와 사회의 불공정 계약 

의사의 기술이 우리사회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중의 하나는 수가이다. 의사가 한번 진료에서 받게 되는 기술료는 관리비를 제외하고 3,000원정도로 생각된다. 그런데,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종종 3억 전후의 배상을 개인적으로 부담해야 한다. 이를 바꾸어 이야기하면 10만 분의 일의 확률로 의사가 잘못 판단하면 10만 번의 의료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추가적인 부담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의사이다. 이 같은 이유로 개원의의 대부분이 위험부담이 있는 시술을 꺼리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생명은 너무도 귀중하기 때문에 의료사고가 나면 이 정도의 배상은 받아야 한다는 것이 국민정서이다. 이번 의료사태에서도 이 같은 시각에서 의사가 생명을 담보로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귀중한 생명을 다루는 기술료로 3,000원은 적절한가? 하고 묻는다면 의료는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에 그 이상은 국민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래서 이런 제도에서는 더 이상 진료를 못하겠다고 하면 이젠 '진료거부'라고 검찰이 나선다. 이는 수가문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의료제도전체에 대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회가 의료계에 권리를 주장할 때와 의료계에 대한 의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중논리가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의료계와 사회는 지극히 불공정한 계약 하에 지난 20 여 년을 지내온 것이다. 이러한 불공정 계약은 정부가 강제로 맺어 주었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의사도 환자도 피해자였다. 의사는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선택하기보다 의료 보험체계 내에서 가장 방어적인 치료법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불공정한 계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의사의 윤리성만 문제삼았다.



2) 불공정계약의 대표적인 예: '의료보호' 제도 

'의료보호'환자를 의료현장에서 기피하게 만든 근본 원인은 이들 환자에 대한 진료비를 정부가 제대로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정은 확보해 두지 않은 채 의료보호 혜택환자 수를 늘리는 일을 선거 때마다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국민에게 무료진료의 혜택의 폭을 늘렸다고 생색을 내는 쪽은 정부이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의사들이 지고 있다. 즉, 정부가 지불기일이 명시되지 않은 백화점상품권을 발행해서 나눠주고, 그 불량상품권을 가지고 온 고객에게 상품을 제대로 줄 수 없어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의사들의 도덕성 부족 때문이라고 언론에서 떠들어댄다. 의료의 기본이 되는 의사와 환자사이의 신뢰는 여지없이 깨어지고 의사들은 언제나 악역을 맡아야 했다.

같은 논리는 의료수가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정부가 정한 의료수가에 대해 국민들은 그 비용으로 해당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그 수가를 비현실적으로 낮추어 간다면 정부는 저 비용으로 복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생색을 낸다. 그러나 실제 의료현장에서는 그 비용으로 진료를 할 수 없다 보니 수많은 문제점이 야기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자연분만이 기피되고 제왕절개 수술률이 높은 현실이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원가의 80%수준으로 수가를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다고 자인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같은 저 수가정책으로 '생색을 낼 수 있었던 집단(정부)'에게 그 결과 왜곡된 의료현실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온갖 비난을 감수해 왔던 집단(의료계)'이 '감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3) 의사들을 일어서게 한 도화선 '의약분업'
 

의약분업은 국민들을 약물의 오남용으로부터 막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의약분업은 오랫동안 의사들이 주장해왔던 것이기도 했다. 약국에서 무분별하게 판매되는 약들로 인한 부작용을 현장에서 항상 보는 것이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의사들은 표면적으로 의약분업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의약분업을 통해 의사가 가지고 있던 업무중에서 약사에게 넘어가는 부분은 조제권이다. 이는 합법적인 권리였다. 이에 상응하여 약사가 하던 일 중에 의사에게로 명확히 넘겨주어야 할 부분은 불법행위인 '임의조제', '대체조제'의 근절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개입하여 만든 결과는 의사의 조제권은 '강제분업'의 형태로 철저히 없앤 반면, 약사의 '임의조제', '대체조제'는 현실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의약분업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일반약의 슈퍼판매는 거론조차 않고, 모든 약의 약국으로의 독점현상을 유도하고 있다. 의사로서의 자긍심은 잃은 지 오래이고 이제 생계조차 걱정해야할 의사들에게 다시 한번 정부는 불공정한 계약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의약분업은 비민주적인 의료환경에서 그들을 압박하던 모든 불합리함에 대한 지난 20년간의 분노를 폭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전공의들이 주장하는 '교과서적 진료가 가능한 사회' 이 한마디에 이 땅에 있는 모든 의사의 열망이 담겨있다. 의사가 자신이 배운 모든 지식과 기술로 환자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 이 땅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것이 과연 민주사회인가?

앞으로 10-20년 후 오늘 의사들의 투쟁은 역사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물러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사들의 투쟁이 돈을 위한 것이라면 폐업은 비난받아 마땅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의'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원한다.


전공의들의 자기 희생적 노력으로 시작된 이번 2차 폐업 투쟁은 약사법개정, 의료수가 인상과 같은 '상대적 명분'때문이 아니다. 경제정의와 사회정의에 어긋난 제도를 의사들에게 강요함으로써 비민주적으로 왜곡되어 버린 의료제도를 이번 기회에 바로 잡겠다는 '절대적 명분'이 의사들을 한 마음으로 뭉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의약분업, 의료보험수가와 같은 지엽적인 문제만을 따로 떼어내어 해결하려 한다면 그 것은 문제의 핵심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 의료계의 폐업사태는 내부적으로는 '醫權鬪爭'이지면, 사회적으로는 의료계와 정부 혹은 의료계와 사회사이의 정의롭지 못한 계약관계를 바로 잡으려는 움직임이다. 醫療의 중요성에 대하여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 의료계와 정부, 의료계와 사회사이에 正義에 바탕을 둔 새로운 契約이 이루어져야할 시점이다.
 

의사들을 돈에 눈이 먼 暴徒로 몰아 '진압'할 것인지, 제대로 된 의료개혁으로의 전환점이 되게 할 것인지는 정부의 선택이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성실한 의사가 올바른 진료를 환자에게 펼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이런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과학교실

허 대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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