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에 있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위대한, 그러나 위험한 진단

작가 리사 샌더스
출판 랜덤하우스
발매 2010.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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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 그러니까 내가 레지던트 하던 시기였다.


1. 지금은 은퇴하신 Nephrologist 방 교수님께서 나와 회진을 도시던 중에 어느 만성 신부전 환자를 청진하다가 "아.. 지금 응급으로 혈액투석 돌리게!" 하고 말씀하셨다.
"네?"
"들어 보게. pericardial friction rub 이 들리지 않는가?"
.. 아무리 애를 써도 내 귀에는 심장 청진음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_-;]
라운드 돌며서 friction rub 도 놓치고 뭐했느냐고 시니어들이 날 갈궜다만..
씨바.. 지들도 못 들었으면서..


2. 역시 지금 은퇴 생활을 즐기시는 cardiologist 최교수님께서 나와 회진을 도시던 중, 어느 환자의 심음을 청진하시더니, "음.. 지금 빨리 심초음파로 확인해 봅시다." 라고 하시네.
"네?"
"들어보세요. tumor plop 이 들리죠? 이게 바로 전형적인 심장점액종양입니다."
...안 들렸다.
그리고 심초음파 응급으로 해 보니 어머나!!! 정말 심장점액종양이었다.


3. 지금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취하시는 pulmonologist 변 교수님께서는 CT 나 기타 첨단 장비들을 별로 선호하지 않으셨다.
그냥 당신이 physical examination 을 하시고(청진기는 안 갖고 다니시며, 회진 때는 꼭 전공의들에게 빌려서 쓰셨다), 영상은 plain chest X-ray 만으로 충분히 진단을 내렸다.
그것도 정확하게. 심지어는 흉부 엑스선 사진을 보면서 세균 명까지도 종종 맞히셨다.
그래서 별명이 '변도사'였다.

확실히 21세기 이전의 내 이전세대 선배님들은 신체검진 내지 병력 청취, 그리고 추리 기술 면에서 우리 세대보다 몇 갑자는 더 고강한 내공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세대는 바뀌고, 기술은 발달해서, 위에 상술한 이러한 '전설'들은 더 이상 나오기 어렵다.
아마 요즘 젊은 의사들은 위에 소개한 옛 이야기들을 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진료에 있어서의 'Back to the basic' 이다.
아무리 첨단 장비를 동원해도, 진료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병력청취와 deduction 능력, 그리고 신체 검사 능력에 소홀하면 안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항상 유념해야 할 것은..
진료라는 것, 보다 범위를 좁혀서 진단을 한다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결국은 환자를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첨단 기술을 사용하건, 아니면 옛 무림고수 같은 선배들을 모범 삼아 멋있게 맨손으로 진단을 하건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확하게 잡아내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basic 한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basic 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basic 이기때문에
detail 한 면에서는 첨단 기술을 이용한 진단의 정확도 보다는 반드시 열등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나서 첨단 기술이 악이고 basic skill 이 선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내가 항상 의대생이나 전공의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진단에 있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
신체 검사 기량이 전설적인 선배 의사들보다 딸려서 쪽팔려 하지 마라.
궁극적으로는 환자의 질병 원인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이 목표이므로,
그 과정이 현란한 내공을 발휘하면서 멋있게 잡아내야 한다는 낭만과 착각에 얽매이지 말 것이며,
내가 기량이 모자란다면 '그래, 씨바. 나 개인기 모자란다. 어쩌라고? 하지만 첨단 기술이 있어! 그걸 이용할 거야!' 하는 배포를 가지고 어떻게 해서든지 질환의 진실에 바싹 다가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이 책은 의료인들이 읽으면서 다시금 기본을 다잡는 목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낭만을 위해 정확도를 희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도.. tumor plop 과 pericardial friction rub 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내시던 선배제현분들의 기량을 아직도 따라잡지 못하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여전히 열등감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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