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제근 교수님께서는 지난 2014년 10월 24일 대한진단검사의학회 추계학술대회의 plenary session 연자로 참석하셔서 "의학용어발전사, 그리고 향후 전망"이란 제목의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교수님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공식적인 마지막 특강 내용을 3부로 나누었는데 제2부입니다.

들어가면서

제1부 우리말 의학용어의 발전사

의학용어집의 연대별 편찬과정



제2부 우리 의학용어 정책의 현황과 방향

1) 의학용어의 기원과 발달과정

2) 의학용어의 표준화 정책

3) 우리나라의 의학용어 정책

제3부 우리 의학용어의 전망

1) 우리나라 의학용어란 무엇인가?

2) 우리나라 의학용어의 바람직한 표준화 방향

   1) 의학용어에서 전문용어와 일반용어를 구분해야 한다.

   2) 우리말 의학용어의 기원인 한자(漢字)를 배척해서는 안된다.

   3) 외래어와 외국어의 우리말 표기방법을 빨리 통일해야 한다  

2. 우리 의학용어 정책의 현황과 방향


용어(terminology)는 ‘해당 분야를 전문하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따라서 의학용어(medical terminology)는 의학(의학자)과 의료(의료인)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쓰는 전문용어이며 의학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언어가 없으면 서로 간에 교통을 할 수 없듯이 의학용어가 없으면 의학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의학용어는 ‘의학이 숨쉬는 공기’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전문용어 중에서 의학용어는 일반인에게 익숙하다. 특히 건강과 관련된 의학용어는 신문이나 방송 등에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자신이나 주위사람의 건강과 관련된 용어는 상당히 넓게 확산되어 거의 일반용어(vocabulary)처럼 익숙하게 사용되고 있다. 설사, 구토, 감기, 황달, 당뇨병, 고혈압, 치매 등을 모르는 일반인은 없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의학용어는 인류역사와 더불어 생겨났고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변화 발달해 왔다.

그러나 모든 의학용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과 더불어 같이 사용하는 용어가 있는가 하면 의학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난해하거나 비밀스러운 용어들도 있다. 역사적으로도 용어 중에서 앞에 속하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말로 점차 바뀌어 왔고, 뒤에 속하는 것은 변함없이 일관되게 사용되면서 의학의 개념형성과 전통유지의 골격이 되어왔다.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의학용어가 탄생하면서 의학발전의 전령사가 되고 있다. 매주 혹은 매월 발행되는 수많은 학술잡지를 통해서 수많은 새로운 의학용어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이들 중 일부분은 전문용어로 정착 된다.

예컨대 ‘이중나사선구조(double helical structure)’란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 이후 이와 관련된 많은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졌고, 이들은 현대 의학발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새로운 용어가 생기는 한편, 잘못되었거나 더 이상 용어로 서의 용도가 없어진 용어들은 용어사전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


1) 의학용어의 기원과 발달과정

우리가 우리말 의학용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모든 나라는 자신들의 의학용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medical terminology'라고 하면 ‘영어’의학용어(English medical terminology)를 말한다. 의학용어의 주요 일차자료가 영어로 되어 있고, 의학문헌 검색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검색시스템인 Index Medicus, Pub Med가 영어로 되어 있다. 즉 영어로 된 의학용어가 현재 전 세계의학의 표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의학용어뿐 아니라 기타 과학용어(scientific terminology)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들어진 의학용어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으나, 의학용어의 기원은 인류가 생활을 시작한때부터 일 것이다. 생활과 더불어 임신, 분만, 출혈, 발열, 사망 등의 용어는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헌상 나타난 것은 그리스인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379)시대에 발간된 ‘Hippocratic corpus’ 라는 방대한 저술에서이다. 여기에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많은 의학용어가 등장한다. 특히 증상(symptom)이나 징후(sign)와 관계된 것, 그리고 감염병과 관련된 많은 용어가 이미 이 시기에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의학용어가 만들어졌고, 이중에는 의학용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일반화된 용어도 많다. 이런 것을 제외 하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의학전문용어(technical terms)의 90퍼센트 이상이 그리스어(Greek)나 라틴어(Latin)에 유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당연히 일상영어(colloquial English)와는 많이 다르고, 이들은 ‘전문용어’라는 이름으로 의학자들 사이에서 익숙하게 사용되었고 결국 전문용어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문용어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난해하였지만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탁월한 조어력(造語力)과 오랜 전통에 힘입어 지금까지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크게 변경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의학용어가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 의학도뿐 아니라 영어권의 의학도에게도 해당한다. ‘scapula’나 ‘femoral artery’를 의과대학 들어가기 전에 알고 있는 미국의 의대 지망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의학용어의 기원이 그리스어나 라틴어이다 보니 현재 사용되는 의학용어는 대부분은 둘 중 하나지만, 두 가지가 섞인 것도 있고, 혹은 두 가지를 함께 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lacrimation”과 “dacryocystitis”는 모두 ‘눈물흐름’과 ‘누낭염’으로 쓰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눈물을 나타내지만 ‘lacrima’는 라틴어 그리고 dacryo'는 그리스어이다. 또 ‘dextral’, ‘sinistral’로 써오던 오른(우)과 왼(좌)이 점차 일반용어화 하여 ‘right’, ‘left’로 바뀌고 다만 dextrocardia(우심증), levocardia(좌심증)등의 전문용어만 남아있다.

2) 의학용어의 표준화 정책

모든 의학용어를 표준화하는 국제기구는 없다. 근래에 와서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용어에 대한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으나 아직은 전문용어에 대한 것은 큰 성과가 없으며 구속력이 있는 기구도 아니다. 또 국제보건기구(WHO)에서 발간하는 국제표준질병사인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ICD)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서 쓰고 있지만 의학용어 전반을 취급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해부학 용어는 국제해부학회협의회(International Federation of Societies of Anatomists)에서 정기적으로 표준안을 만들어 발표하고 있으며 Nomina Anatomica에 이어 현재는 1998년에 개정된 Terminologia Anatomica (TA)가 사용되고 있다.

이 협의회에서 해낸 큰 업적은 그동안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제멋대로 쓰고 있던 해부학용어를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통일하고 그것을 근거로 제나라말로 옮겨 쓰도록 한 것이다. 특히 사람 이름이 붙은 많은 용어를 형태학에 근거한 이름으로 바꾼 것은 획기적이었다. 예컨대 ‘Sylvian fissure’, ‘Rolandic fissure’등 일상화 되었던 용어를 ‘lateral sulcus’, ‘central sulcus’로 바꾼 것이다. 물론 국가에 따라 많은 저항이 있었으나, TA를 계기로 이른바 ‘global standard’가 되어가고 있다.

해부학용어를 제외한 기타 의학용어에서는 난해한 그리스어-라틴어 유래 용어에서 순수 영어용어로 변경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cyesis’라고 쓰는 ‘임신’이란 용어를 ‘pregnancy’로 바꾼다던지, 심장을 나타내는 ‘cor’를 ‘heart’로, 또는 췌장을 나타내는 ‘lien’을 ‘pancreas’로 쓰는 것 등이다. 또 해당 징후나 질병을 처음 기술한 사람이름이 들어간 용어(eponym)가 점차 없어지고 원인이나 병변을 근거로 한 이름이 점차 증가하고 경향이다. ‘한센병(Hansen's disease)’이 ‘나병(leprosy)’으로 ‘버거병(Burger's disease)’이 ‘폐쇄성 혈전맥관염(thromboangiitis obliterans)’, 그리고 ‘다운증후군(Down's syndrome)’을 ‘21삼염색체증(trisomy 21)’으로 부르는 것 등이다.

한편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학용어가 추가될 때는 대개 그것을 처음 발견 혹은 발명한 사람이 명명한대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용어란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것으로 서로 통하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새롭게 발견된 유전자나 단백질의 이름은 각 나라말로 따로 번역하지 않고 처음 기술된 용어 그대로 음차어로 쓰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의학용어 중에는 영어권 영어가 가장 많지만 누구든지 새로운 것이 인정받으면 새 용어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우리말로 된 새로운 의학용어(물론 영자로 표기된 것)가 세계의학계에서 널리 쓰게 될 날이 기대 된다.

3) 우리나라의 의학용어 정책

우리나라 의학용어란 우리말로 된 의학용어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전통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의 영향에 있었기 때문에 한의학과 관련된 우리의 의학용어는 있었지만 서양의학과 관련된 우리말 용어는 가져보지 못한 채 구한말 개화기를 맞게 되었다.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는 과정이 능동적으로 직수입한 것이 아니고 일본과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서양의학용어를 우리가 공부하여 적당한 우리말 대응어를 만드는 과정이 없었다. 서양의학이 동양으로 들어오면서, 한자문화권의 국가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은 영어용어에 대한 동양어 대응어를 만드는데 있어서 공동운명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위에 열거한 세 나라 학자들이 모여

공동 작업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하였겠으나 사실은 이 일을 일본이 거의 혼자서 했다. 1800년도 초반 유럽의학을 수입한 일본은 서양의학용어의 기원이 된 그리스어, 라틴어에 해당하는 한자(漢字)를 찾아 용어를 창작하였다. 현재 한,중,일이 같이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기본의학용어가 이때 만들어 졌다. ‘nerve’를 ‘神經’으로, ‘artery’를 ‘動脈’으로, 그리고 ‘cell’을 ‘細胞’등으로 만든 것이 좋은 예이다.

‘한국 의학용어’(Korean Medical Terminology)란 한글로 된 의학용어이다. 그동안 대한의사협회 용어위원회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에서 우리말과 잘 부합하는 것은 그대로 두고, 어법이나 표기 혹은 의미 해석에서 우리에게 맞지않는 일본식 한자용어를 찾아내어 우리에 맞는 용어로 순화하여 쓰기 쉽고 배우기 쉬운 우리용어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우리가 전통한의학에서 써오던 용어 중에서 서양의학용어와 부합되는 것은 그대로 쓰고있다. 특히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속하는 심(心) (heart), 폐(肺) (lung), 간(肝) (liver), 신(腎) (kidney), 비(脾) (spleen), 장(腸) (intestine)등은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써오던 용어로 이것을 우리가 잘 지킬 필요가 있다. 다만 ‘stroke’(뇌졸중)를 ‘중풍’, ‘diabetes’(당뇨병)를 ‘소갈’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다.

의학용어 정비작업이 그동안 쓰고 있던 한자용어를 모두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nausea’를 일본식 한자용어인 ‘오심(惡心)’에서 ‘구역’으로, 골조송증(骨症)을 ‘골다공증(骨多孔症)’으로 순화한 것 등이 일본식 한자어를 국어식 용어로 바꾼 대표적인 것이다. 우리가 쓰는 의학용어의 기본이 한자이기 때문에 우리의학용어를 만들기 위해 의학용어에서 한자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제거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한글전용화 정책에 따라 한자교육에 소홀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한자식 의학용어가 우리용어가 아니고 중국말이나 일본말 용어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한자를 완전히 용어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토박이 우리말만 가지고는 전문의학용어를 만들 수가 없다. 의학적 개념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 ‘과학’, ‘신경’, ‘용혈’, ‘경색증’, ‘기생충’등의 용어를 토박이 우리말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영어권 사람들이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기원을 둔 용어를 영어가 아니고 어렵다는 이유로 이것을 버리고 순수 영어식으로 바꾼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의학계에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예컨대 ‘hepar’를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는 ‘liver’라고 쓰는 것은 좋으나 ‘hepatitis’(간염)를 ‘liveritis’로 바꾸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원이 한자로 된 것은 그대로 두고 일반인들과 함께 쓰는 용어를 잘 선택하여 이들을 우리 고유어로 만들어 같이 쓰면 된다. 예컨대 ‘kidney’는 ‘신장’과 ‘콩팥’을 같이 쓸 수 있으나 ‘nephritis’는 ‘콩팥염’이 아니라 ‘신장염’으로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용어를 표준화 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또 여러 전문가와 더불어 토의를 통하여 공론화를 통하여 수행되어야 한다. 특히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전문 학술지에 이르기까지 용어가 통일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