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은 고대로부터 계산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배우는 수학책(과거 슬기로운 생활 또는 산수로 불렸지만 수학으로 바뀌었다)을 보노라면 나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 두 자리 수의 덧셈을 여러 방법으로 하는 것을 연습하는 단원이 좋은 예다. 34+28은 30+20, 4+8 십의 자리와 일의 자리를 각각 더해서 50+12=62가 될 수도 있고, 34+20을 먼저 하고 54 +8을 해서 답이 62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34+8을 먼저 해서 42에다 20을 더해서 62가 될 수도 있고, 28+30을 먼저 하고 58에 4를 더해서 62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더하는 방법의 경우의 수는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방법보다 더 많다. 현재 교과서는 앞의 두 가지 방법만 가르친다. 또 시험문제는 그 두 가지 방법에 맞춰서 나온다. 풀이과정을 직접 쓰거나 빈칸을 채우는 문제는 교과서에 나온 방법대로 하지 않으면 자칫 ‘틀린 답’이 되기 쉽다.

초등 수학을 풀고 있자니, 내가 몸담고 있는 진료현장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과학이 발전하고 이전에 몰랐던 질병의 기전들이 밝혀지면서 이런저런 신약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이 정해놓은 틀에 맞추지 않으면 삭감되기 일쑤다. 게다가 불법청구 또는 임의비급여의 오명을 안게 되면 환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까지 생기다보니, 제아무리 십 수 년 경력을 쌓은 의사라고 해도 심평원의 급여 기준에 맞춰 처방해야하는 것이 초등학교 2학년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올 3월부터 전이·재발성 대장암에 쓰는 표적치료제에 보험급여가 되기 시작했다. 아바스틴과 얼비툭스란 항암제를 일차요법으로 사용할 경우 ‘암환자 산정특례제도’에 의해 본인부담금을 5%로 감면받게 된 것이다. 환자들 입장에서 보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의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약을 쓰기 어려워졌다는 불만들이 나온다. 전이암 환자에서 약제를 투여하는 순서에 따라 처음 쓰는 약을 일차요법, 여기에 내성이 생기거나 부작용으로 인해 약을 바꾸면 그것을 이차요법으로 부르는데, 과거에는 치료의 어느 과정에서나 비보험으로 아바스틴과 얼비툭스를 쓰겠다고 하면 사실상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일차요법으로 보험적용을 받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이차, 삼차요법에서의 비보험 투여가 역으로 제한을 받게 된 것이다. 바뀐 심평원의 규정은 일차요법에 항암제와 아바스틴을 썼던 경우에 이차약물로 아바스틴을 병합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아바스틴은 일차요법에서만 보험급여고 이차부터는 건강보험에서 지원을 해주지 않는 비급여다. 이 경우와 반대로 일차요법에 아바스틴을 사용하지 않고 얼비툭스를 쓰거나 기존의 항암제만으로 치료했던 경우에는 아바스틴뿐 아니라 함께 투여하는 항암제까지 모두 비급여로 처리하도록 했다. 사실상 쓰지 말라는 얘기다. 얼비툭스 역시 이차요법 이후에는 이리노테칸과의 병용요법만을 쓸 수 있도록해 다른 조합은 불법인 임의비급여가 됐다.

워낙 복잡해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심평원에서 정해놓은 방식과 순서대로만 약을 쓰라는 얘기다. 나름대로 두 자리 수 덧셈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하는 방식은 비록 답이 맞다고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안내해준 방식이 아니라서 틀렸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의학적으로는 환자의 치료과정에서 치료 차수에 관계없이 쓸 수 있는 약제를 최대한 다 활용하는 것이 전이성 대장암 환자의 생존기간 연장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질병과 환자의 상태에 따라 표적치료제와 항암제의 조합을 다르게 하는 경우도 종종 권장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심사체계에서는 그런 의사의 재량권이 없어졌다. 의학적으로 타당한 치료이고 환자가 자기 부담으로 치료를 원해도, 정해진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실상 처방할 수 없는 셈이다.

과거에는 비보험 치료라 보험재정과는 별개였는데 왜 갑자기 이런 제한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의사들도 지쳐서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치료가 있다고 해도 설명하지 않고 심평원이 정해준 순서대로 기계적인 처방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다수의 환자들이 표적치료제를 투여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은 분명 이전보다 나아진 것임에 틀림없지만, 뭔가 뒷맛은 씁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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