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되돌아보면 나 역시 그런 의사이기는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환자와 동료의료진을 대하는 태도를 고쳐보도록 해라’고 쉬이 말할 수가 없다.
환자를 위해 열심히 이것저것 챙기고 찾아보고 해도 돌아오는 건 편의점 직원을 대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간호사들에게서 들려오는 밑도 끝도 없는 보고들은, 사실 보고라기보다는 ‘책임지라’는 말로 들린다. 잘 모르는 콜은 우선 짜증이 나니까 대충 처리하거나, 신경질 한판 부린 다음에 책을 찾아보며 나의 무식함을 실감하면 또 다시 짜증이 나기 십상이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 아마 그 시기를 견뎌낸 힘은 ‘그래도 이 시기를 끝내면 뭐라도 되겠지’란 막연한 기대었다. 물론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된다거나, 구체적인 연봉을 상상하진 않았지만 지금보다는 사람답게 살 수는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그나마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3년차 전공의가 되면서 비로소 인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환자가 나의 짐이 아니라 내가 돌봐야 할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환자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 상황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신규간호사들은 마치 병원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하수구 역할을 해야 하는 처지란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당직을 서는 생활을 하면 누구나 그 정도는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365일 당직을 서고, 만성적인 수면부족의 상태에서 누군가를 배려하라고 한다면 지켜지기 쉽지 않다.
의사는 공감능력이 좋아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좀 더 환자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의사를 원한다.
그런데 신체적 정신적 결핍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에게도 공감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잔인한 일이다. 전공의들에게 일상이란 일단 기본적인 생존의 조건(식이, 휴식, 수면)이 박탈된 상태에서 오늘도 큰 사고 없이 지나가는 것이 목표일뿐이다.
이를 위해서 온 신경을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삶인데, 이해, 공감, 배려 등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 수 있을까. 전공의들이 사고를 피하고자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원에는 종종 사고가 난다. 우리 의료의 비참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공의의 수련 및 근로기준에 관한 특별법안’을 준비중이란 소식을 들었다. 주 최장 64시간의 근무시간은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달성 가능한 목표처럼 보이진 않는다. 사실 이전 수련규정에 명시되었던 80시간도 얼추 짜 맞춰 기형적인 근무시간표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않나.
수련규정에 맞춰서 근무시간표를 제출하라는 압력은 보건복지부로부터, 대한병원협회로부터, 병원 집행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책이 없는 상태로 덜렁 떨어졌다. 그것을 받아 안은 지도전문의와 교수들은 본인이 작성하던지 전공의들에게 떠넘기던지 둘 중 하나의 선택밖에 없었고 대부분 후자를 택했다. 나 역시 일부는 괴로워하며 없는 시간을 짜내어 엑셀파일을 두들겨 내었고 일부는 전공의들에게 떠넘길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전공의특별법의 시행과정이 이런 문제를 다시 발생시키지 않으려면 부족한 인력을 보강할 수 있는 비용에 대한 지원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행히 전공의특별법에는 정부가 수련비용을 지급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근거와 규모를 정하는 것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되고 자칫 유야무야될 수도 있는 부분인 것 같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수련비용을 지원할 것인지, 정부예산에서 지원할 것인지 명분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향후 지속적으로 특별법 제정과 시행과정을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아이는 그 트라우마로 인해 학대를 하는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슬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의사들의 메마른 감성과 소진에는 이러한 수련시절 학대에 가까운 비참한 생활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활을 겪은 전공의들이 전인적인 진료를 펼치는 좋은 의사가 되려면,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이 수련과정에서 좀 더 휴식을 취할 수 있고 제때 식사를 하고 잠을 잘 수 있다면, 피할 수 있는 의료사고는 좀 더 줄어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환자의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감능력을 갖춘 의사로 자라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