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가 사라진 이후


스크립스 중개과학연구소(Scripps Translational Science Institute) 에릭 토폴 소장이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란 신간을 냈다. <청진기가 사라진다>의 후속작인데, 전작이 디지털 헬스(Digital Health)의 총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디지털 헬스 중에서도 스마트폰으로 변화될 의료의 미래에 더 집중하고 있다. <청진기가 사라진다>에 비해 훨씬 쉽게 썼을 뿐더러, 내용도 꽤 알찬 편이다.

에릭 토폴은 과거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심장내과 교수로 있으면서 수많은 연구를 진행했었던 임상 의사다. 특히 바이옥스(Vioxx)의 안전성 문제를 제기해 퇴출시킨 주도적인 역할을 해 유명인사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렇듯 임상 의사로서 최고의 위치에 섰었던 그가, 디지털 헬스의 전도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무엇보다 개인들이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는 수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의 신간 <청진기가 사라진 이후>에도 나와 있듯, 이미 몇 년 전에 전세계 인구수보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디지털 장비의 수가 더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지구상의 모든 숟가락, 젓가락보다 디지털 장치가 더 많을 것이란 우스개(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는) 소리도 있지 않은가.

둘째, 스마트폰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정보 중에 건강정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애플워치나 삼성에서 나온 기어와 같은 스마트워치를 사용하는 인구도 늘고 있는데, 이를 이용하면 운동량도 정확히 체크할 수 있을뿐더러 심박수까지 기록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안과, 피부과 검사가 가능한 어플리케이션이나, 스마트폰을 초음파나 이경(耳鏡)으로 변신시켜주는 저렴한 부가장치도 판매되고 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으로 심전도를 측정해 위기상황을 넘긴 경험담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셋째, 고비용 구조인 미국의 의료시스템도 중요했을 것이다. 2011년 현재 OECD 국가 중 GDP대비 보건의료비 지출은 미국이 약 18%로 압도적인 1위다. 비싼 비용을 치루는 만큼 선진화된 의료를 자랑하고 있으나, 거시적인 통계로 보면 평균수명이나 영아사망률 등은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비용대비 효용성(Cost effectiveness)을 생각했을 때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이런 구조를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을 통해 좀 더 싸고, 효율적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을 했을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가고 있다. 미국에서 디지털 헬스의 규제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완화되는 추세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FDA)는 건강 어플리케이션에 있어 별도의 심사과정을 생략하고 사전 등록만 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많은 기업들이 디지털 헬스 사업에 뛰어들도록 만들었고, 일부 실험적인 보고에서는 진료비 절감 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미국보다 아프리카와 같은 저개발국가에서는 더 파괴적인 사례가 보고 되고 있다. 스마트폰에 간단한 장비만 붙이면 백내장을 진단받을 수 있으며, 초음파 프로브(Ultrasound Probe)를 스마트폰에 장착해 복통 환자의 실시간 영상을 보내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의료용은 아니지만 내시경까지 나온 상태다.

토폴의 이런 도전을 보고 있자니, 우리나라만 뒤처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생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나라가 뒤쳐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동기(動機)의 부족이다. 우리는 미국처럼 의료비용이 비싸지도 않고, 의료의 물리적 접근성이 나쁘지도 않다. 그렇다고 아프리카처럼 의료의 불모지도 아닌 까닭에, 굳이 의료기기로 정식 허가를 받지도 않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진단할 필요성도 없다.

이런 정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해외 사례를 따르다보면 엉뚱한 정책이 나오기도 한다. 원격의료법안도 넓게 보면 그 중 하나다. 좁디좁은 대한민국에서 원격의료로 디지털 의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망상에 가깝다. 좀 더 근원적으로 우리 의료시스템의 문제점을 보완할 방안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그것을 파악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디지털 헬스를 이용해 의료혁신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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