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여자 미국 유학생이자 여자 의사인 김점동. ‘에스더’는 세례명이고, ‘박’은 남편의 성을 따른 것이다.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을 봐주던 아버지 김홍택의 영향으로 선교사들과 인연이 닿아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 김점동. 당시 근대적 학교들은 양반자제들의 교육을 목표로 했지만 신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있어 선교사들과 연관된 인물의 자제들이 입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이화학당의 네번째 학생이 되던 해 당시 열살밖에 되지 않았으나 영어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김점동은 졸업할 즈음에 이미 현재의 이화여대병원인 보구여관(당시 여성을 위한 유일한 병원)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어느 날 여의사인 로제타 홀이 구순구개열(언청이) 환자를 수술해 고쳐주는 것을 보고 감명을 느껴 스스로도 의사가 되고자 마음을 먹는다.


이런 어린 소녀의 바램이 로제타 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그녀가 17세가 되던 해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그녀의 조수이자 한국인 선교사였던 박유산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1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학생이 된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졸업을 앞둔 그녀에게 불운이 닥치게 된다. 바로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의 뒷바라지를 했던 그녀의 남편이 졸업 3주일을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한 것이다.

남편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하고 우등생으로 의대를 졸업한 그녀는 귀국해 보구여관에서 일했는데 당나귀를 타고 왕진을 다니기도 하며 열정적인 활동을 했고 10개월 동안 진료한 환자가 3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물론 교통이 발달한 요즈음과 비교해서는 안 될 숫자다.

이렇듯 열정적인 삶은 살았던 그녀는 1910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같이 폐결핵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찬란하게 불타 올랐던 그녀의 삶을 짧은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미투'시대에 그녀를 되돌아보게 된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되었지만 순수한 인간애로 의사가 되고자 했던 한 여성이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끝내 꿈을 이루었던 백년 전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백년 후인 현재와 비교해 볼때 남녀를 불문하고 과연 기회는 평등해졌나, 과정은 정의로운가 반문하게 된다.


오늘(3월 16일)은 한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김점동이 1876년 태어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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