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는 말리는 사람뿐이었다. 안 된다, 위험하다, 왜 사서 고생을 하니.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어요, 아니면 인생에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지금 그는 10년 전 입 밖으로 냈던 ‘꿈’을 이뤘다. 모교 혈액종양내과 교수로 발령받은 지 2년, 박경화 교수는 오전 7시에 출근하고 밤 11시에 퇴근하는 의대 교수의 생활을 기쁘게 즐기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내과 보드를 따고, 전임의를 하고, 미국 연수를 마치는 동안 누구도 그의 선택을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근심어린 표정만 함께 했을 뿐. 박 교수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사실을 매번 증명해야 했고, 지금 사람들은 그의 지난 선택에 대해 때늦은 혹은 진정어린 축하를 보내고 있다.










박경화 교수는 1998년 의사국가시험 수석합격자다. 매년 나오는 국시 수석자가 모교 교수가 되는 것은 별로 특이하지 않은 일 같기도 하지만, 박경화 교수의 경우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와, 난 참 운이 좋았구나’ 싶을 정도로 ‘특별’한 일이다.





수강과목이 20개가 넘는 본과 3학년 시절 기말고사를 앞둔 6월 초, 그는 급작스런 배의 통증으로 응급실로 실려갔다. 충수돌기염 쯤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수술에 들어간 외과의는 산부인과 전문의를 불러야 했다. 양쪽 난소에서 종양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한쪽은 커져 있는 상태였다.





“경계성 암이라 수술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는데 항암제를 6번 맞고 수술을 했는데도 남아있는 거예요, 그 때 택솔을 미국에서만 구할 수 있어서 직접 사다가 맞고 또 6개월 치료하고, 그렇게 18개월간 항암치료를 했죠.”





◆ 학교로 불려가다





복학하고 나니 2년 후배들과 동급생이 됐다. 열심히 공부했고, 무사히 국가시험도 치렀다.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잘 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고. 모교에서 학교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친구와 해외여행 갈 계획을 열심히 짜고 있던 때였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죠. 불려 다니던 사람이 아니라, 하하. 갔더니 수석이라고 해서 당황스러웠어요.”





결국 여행은 못 갔고, 졸업할 때는 ‘국시수석자용 의학대사전’을 받았다. 대신 20년 만의 고려의대 출신 수석이라고 해서 학교 측에서 상패와 순금 메달을 준비해 주었다.





“ 수석하면 의협에서 차를 준다더라, 이런 소문도 있긴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하하. 대신 지석영의학상이라고 의료계 업적 많은 선생님들께 주는 상이 있는데 그 해에는 제가 받았어요. 지금은 은퇴하신 감염내과 은사님이 그 상 받으실 때 축하하러 갔었는데 제가 받으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합격률 90% 안팎의 의사국시지만 의대생 박경화의 성취는 상으로 치하할 정도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 “남보다 나를 만족시키는 것이 힘들었어요”





“ 당시 국시 경향요? 제가 시험보기 2년 전에 문제가 굉장히 많이 바뀌긴 했지만 저희 때는 공부하면 무난히 합격하는 수준이었어요. 합격률도 높았고요. 저희 동기들이 굉장히 열심히 하는 분위기라 결시한 경우를 빼면 재수한 선배들까지도 거의 다 합격했어요.”





교 과서 중심으로 예복습을 꼼꼼히 했다는 ‘수석다운’ 공부비법을 밝히는 박 교수. 하지만 그에게 국시 수석이라는 꼬리표는 예쁘지만 불편한 장식 같은 것이다. 인생의 깜짝 이벤트쯤으로 생각했던 이 경험은 아직도 가끔씩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난다.





“이런 인터뷰처럼요, 하하. 가끔 수석이었지, 하고 기억하는 교수님들도 계시죠. 기대치가 있더라고요. 인턴, 레지던트 하는 내내. 의식 안 하려고 노력은 했는데 신경은 쓰였어요. 그런데 남들이 저한테 하는 기대보다는 제가 저한테 하는 기대가 더 컸어요. 의사가 의사한테 하는 기대보다 환자가 의사한테 하는 기대가 더 크거든요. 제가 환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의사인 제가 환자가 원하는 잣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봐 걱정이었어요.”





◆ 의사가 되고 싶었던 유치원생





다들 힘든 내과 1년차, 병력이 있다고 예외는 없었다. 내과 수련 1년 만에 암이 재발했다. 남들은 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인 그를 다시 보리라는 기대를 접었지만, 그는 1년 투병 끝에 다시 2년차로 돌아왔다. 마침내 내과 전문의가 됐을 때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다.





“내과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어요. 전임의로 남을 때도 시애틀로 연수를 갈 때도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은 다 반대했지만, 내과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뜻을 관철시켰죠. 그러다 보니 영광스럽게도 모교 교수로 돌아오게 됐지만 국시수석 당시 인터뷰에서 암 전문의가 되겠다고 했던 것은 말 그대로 ‘꿈’이었어요. 제가 생각해도 놀라운 경과였죠. 모든 환자들이 다 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처음 의대를 지망했을 때도 부모님은 늦게 얻은 막내딸이 ‘험한’ 의사가 되는 것을 마땅찮아했고, 중병에 시달릴 때도 의사의 길을 걷는 것을 그만뒀으면 하는 의견이었다고.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처럼 처음에는 꼭 의사가 되겠다는 딸의 의지에 꺾였고, 요즘은 의사라 더 행복하다는 딸의 인생을 전적으로 응원하고 있다.





“유치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의사 선생님이 저를 치료하는 것을 ‘성스럽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환자를 보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뻐요. 게다가 모교에서 말이죠.”





◆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





암 투병은 주치의를 박사 지도교수로, 지금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선배이자 동료로 만나는 특이한 경험도 하게 해주었다. 그녀는 입학, 졸업, 입국, 전문의 동기가 다 다르다. 그렇게 만난 동문들에게 낸 축의금을 다 모으면 차 한 대는 너끈히 뽑을 정도라고 웃는다.





아직은 교수님이라 불리는 것도 어색한 ‘초짜’ 교수고, 학교 다니던 20년 전이나 달라진 것도 별반 느낄 수 없다. 다만 의사는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봉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큰 변화다.





한때 봉사는 따로 시간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요즘은 내 앞에 있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봉사라고 생각한다고.





“의사는 환자에게 자신을 가능한 많이 내줘야 하고, 그래야 마음이 편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이젠 알았죠.”





그러고 보면 박 교수에게 의사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다. 의사가 된 지 12년, 여전히 환자 보는 것이 가장 기쁜 그는 자신의 기적을 환자에게 재현하기 위해 매일 연구실 불빛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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