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6일 국내 질병관리본부는 중국 청해성 (하이난) 지방에서 제1군 법정전염병 및 검역 전염병인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발생함에 따라 전국 검역소를 중심으로 검역을 강화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제1군 법정전염병은 공중보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보건당국이 상당히 신경쓰는 질병군이 되겠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 페스트는 과거 흑사병으로 불리는 질병으로 유럽의 인구 절반을 줄인 엄청난 전염병입니다. 인류의 역사로 볼때 많은 변화를 가져온 질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세기에 유럽에 전파된 흑사병의 전염 경로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실크로드(비단길)과 몽골 제국이 관련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몽골 제국은 비단길을 통해 중앙 아시아와 유럽을 점령하였으며 1347년 몽골의 공격이 있었던 크림 공화국의 페오도시야에서 흑사병이 창궐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전쟁 중 몽골인들은 흑사병에 걸려 죽은 시체를 상대편 성 안으로 투척하기도 했는데 원래는 상대편의 사기를 꺾기 위한 방법이였지만 그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시신에 있던 페스트균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퍼져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마치 생화학 무기가 성 안에 터진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 것이죠.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전파 양상 - Wikipedia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전파 양상 - Wikipedia


하지만 몽골에 의한 전파가 흑사병 확산의 유일한 원인은 아닐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 기후 변화, 그리고 병의 원인에 대한 무지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치루게 된 것이죠. 당시 몽골의 중국 점령지를 보면 농업과 상업 모두 붕괴되었고 기아가 만연했는데 이로 인해 중국 인구가 1억 2천만명에서 6천만명으로 급감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기후도 흑사병 확산에 일조했는데, 14세기 초 유럽의 기후는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연 평균 기온이 하락했습니다. 겨울 추위가 매서워지고 여름 기후도 좋지 않아 작황이 좋지 않았고 그로 인한 기근이 심해진 것이죠.


이런 이유로 흑사병은 유럽에 치명적인 인명 피해를 남겼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흑사병으로 사망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습니다만, 많은 기록에서 해당 지역의 절반 가까운 인구가 감소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추정하기로는 유럽 대유행때 전세계 인류의 4분의 1이 줄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국 웨이머스의 흑사병 기념 동판, ‘영국에 이 항구를 통해 1348년 흑사병이 들어왔고 이 나라의 총인구의 30-50%가 사망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 Wikipedia

영국 웨이머스의 흑사병 기념 동판, ‘영국에 이 항구를 통해 1348년 흑사병이 들어왔고 이 나라의 총인구의 30-50%가 사망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 Wikipedia


흑사병은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절대 권력 중세 교회의 위세를 꺽게 됩니다. 교회에서 구원의 메시지를 아무리 던져보아도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되니 사람들이 교회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죠. 한편으로는 ‘흑사병’을 신의 분노라고 생각해서 유태인을 희생 제물로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에 미친 영향뿐 아니라 신분계급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일할 사람이 귀해지게 되자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장원제도를 유지하기 어려웠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 소설가 지오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가 쓴 <데카메론>에는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의 초기 증상으로는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 종기같은 것이 생겼고 때로는 크기가 커져서 사과만큼 자라기도 했다. 팔이나 허벅지 등에 납빛 또는 검은 반점이 나타났다.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흑사병의 원인을 모르던 사람들은 병을 퍼트리는 존재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그림은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품 - Wikipedia


훗날 페스트의 원인이 쥐, 다람쥐등 설치류에 서식하는 벼룩이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를 사람에게 옮기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박테리아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다시 사람을 물게 되면 질병의 전파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죠. <데카메론>에 나온 서혜부, 겨드랑이 종기는 임파선종 페스트를 묘사한 것인데 가장 흔한 형태의 페스트입니다. 이 외에도 폐렴성 페스트가 있으며 합병증으로 생기는 패혈성 페스트도 있습니다. 패혈증 상태에 빠지면 피부 아래에 멍이 든 것 같이 보이는데 이런 증상 때문에 흑사병(Black death)라고 불렀던 것이죠.


흑사병의 원인이 박테리아고, 설치류에 사는 벼룩이 문제라는 것을 아는 지금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페스트는 산발적으로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고 있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 질병관리 본부에서도 매우 위험한 병으로 자국민의 건강을 위해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테러리스트들이 생화학 공격에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페스트 균이 포함된 연무나 증기를 흡입할 경우에는 폐렴성 페스트에 걸릴 수 있고 페렴성 페스트는 임파선종 페스트와 달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생화학 공격과 같은 끔찍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최근 여행이 활발해지면서 페스트 감염 사례가 있었던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해당 지역 야생동물로부터 애완동물에게 벼룩이 옮겨져 사람에게 감염되는 사례가 종종 발생되어 보건 당국을 긴장시키기도 합니다. 특히 수의사나 애완동물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서 직업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치료 약물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증상이 고열과 두통, 오한, 몸살 증상으로 단순 몸살 감기로 치부할 수 있어 진단이 늦어지는 경우가 생기며 패혈증형의 페스트의 경우 사망률은 지금도 60-90%에 이릅니다. 미국의 경우 전체 페스트의 약 14%에서 사망에 이른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페스트 환자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만, 세계적으로 보면 연평균 약 1500명의 환자가 발생해서 10%가 사망하는 여전히 위협적인 질병입니다. 그러나 올 여름에 발생한 중국의 페스트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국에서는 가끔씩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새로운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해당 지역을 여행할 경우 감염의 위험이 있으며 적절한 항생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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