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눈이 안 보이게 된다면, 그것도 나 혼자 그런 게 아니라 내 주변은 물론 전 세계의 인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실명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을 그리고 있는데요, 1998년, 포르투갈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제 사라마구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입니다.


인류 최악의 전염병은?


주제 사라마구는 보르헤스와 마르케스의 뒤를 잇는 남미 매직 리얼리즘(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너무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의 거장으로 불립니다. 과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어서 영화 보는 내내 오싹한 느낌을 받는데요, 이 영화를 보면서 의학이 발전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염병이 위협적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특히 신종플루가 유행하고 있는 요즘이라서 이런 생각이 들었겠죠.


인류 최악의 전염병은?


눈먼자들의 도시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멀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유도 모르고 어떻게 전염되는지 경로도 모릅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눈이 먼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전염된다는 거죠.


세상에 이런 전염병이 또 있을까요? 실제로 이렇게 전염되는 질병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감염시켰다는 점과 연계해서 역사적으로 최악의 전염병 하면 페스트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기는 하신 것 같습니다. 중세 시대 전체 인류의 1/4가량이 이 페스트를 통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페스트(흑사병)은 치명적이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전을 떠올릴 필요도 사실 없습니다. 불과 100여년 전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미국 인구 중 550만명이 사망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스페인독감인데 H1N1형으로 현재 유행하고 있는 신종 플루와 같은 형태입니다.


신종플루가 아니더라도 이 인플루엔자는 현재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가장 두려운 전염병 중 하나입니다. 특정한 전염성 질환이 전 세계로 급속히 확산돼 유행하는 현상을 ‘팬데믹(pandemic)’이라고 하는데요, 세계보건기구(WHO)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3대 요소로 식량 부족, 기후변화와 함께 이 팬데믹을 지목했습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 격리?
<(C) Jou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AMA,-1918년부터 1919년 사이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십만명당 사망자수) 추이>



바이러스 vs. 세균


바이러스와 세균이 헷갈린다는 분들도 많은데요, 간단히 말씀드리면, 세균은 독립된 세포로써 독자생존이 가능하지만, 바이러스는 단편적인 DNA 또는 RNA와 같은 유전 정보만 있어서 다른 생물(숙주)의 세포 속에 들어가 일종의 기생해야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생존할 수 없어서 다른 세포 속에 들어가 증식에 필요한 단백질을 생산하도록 합니다. 달리 말하면 숙주가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서 어찌 보면, 세균보다 바이러스가 열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세균보다 더 단순한 구조이지만 세균이 이분법으로 자신을 복제해나가는 것에 비해 이 바이러스들은 숙주 세포의 유전자를 복제하거나 단백질 합성 도구를 맘대로 사용해 자신과 같은 바이러스를 대량으로 쉽게 생산해냅니다.


또 의학적으로 세균에 대응하는 항생제는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바이러스 감염의 경우 감염에 사용하는 치료제 개발이 항생제만큼 개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방접종을 통해 사전에 면역을 체득하는 방식으로 극복해가고는 있습니다.


인플루엔자의 경우에는 항원의 종류가 H 15종, N 9종으로 아주 다양한 경우의 수가 있어서 매년 WHO에서 그 해에 유행할 독감의 종류를 예측하여 매해 독감 백신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측한 독감이 유행하지 않고 다른 종이 유행할 경우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인한 합병증 폐렴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늘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08년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백신이 실제 유행한 인플루엔자와 차이를 보였다는 비판도 있었죠. 또 언제든 변이와 변종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법, 격리?

다시 영화로 들어가면, 전염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하지만, 누구도 원인을 찾지 못합니다. 오히려 연구진까지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실명하는 상황에 이르죠. 결국, 정부는 질병확산을 막기 위해 격리조치를 취합니다만, 수용소를 지키던 병사들도, 질병을 통제하는 보건당국의 대표도 원인을 알 수없는 전염병에 감염되어 모두가 눈을 멀게 되죠.




<(C) Jou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JAMA,-도시별 격리 및 학교, 집회 취소 정도에 따른 사망률 차이가 나타남>


영화 속에서는 격리수용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전염병에 있어 격리가 무용지물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1918년 유행한 스페인 독감의 경우 이 격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미국에서만 오백오십만명이 사망했고 전 세계적으로도 4천만명정도가 사망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미국의 권위 있는 학술지 JAMA(Journal of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미국질병관리센터와 미시간 의대 연구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1918년과 1919년 사이 미국의 43개 대도시 중에서 <학교 폐쇄>, <군중 집회 취소>, <감염된 사람의 격리> 등의 조치를 취한 도시의 경우, 사망률이 증가하지 않고 서서히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시민들의 불편사항을 고려해서 이런 조치에 미온적이었던 도시는 사망률이 계속 증가했다고 하죠. 정리하면, 전염병에 있어서는 격리 등의 조치가 피해를 줄이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신종플루 팬데믹, 불행중 다행인 것은


신종플루 팬데믹, 불행중 다행인 것은

영화 속 도시는 눈먼 자들로 가득차 그야말로 원시의 세상입니다. 모든 문명시설이 마비되었고, 거리는 배설물로 가득 찼으며,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이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서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문명이 사라진 곳에서 사람들은 순식간에 짐승이 된다는 것이죠. 안 그래도 신종플루 공포가 만연한 지금, 영화 ‘눈 먼 자들의 도시’는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영화와는 달리 신종플루는 백신도 개발이 되었고, 대응법도 알고, 심지어 감염된 사람의 99% 완치가 되니 신종플루에 대한 공포를 가질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말입니다.


Source : Nonpharmaceutical Interventions Implemented by US Cities During the 1918-1919 Influenza Pandemic Howard Markel, MD et al. JAMA, August 8, 2007Vol 298,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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