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부인과개원의협의회에서 정말 발벗고 나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불법낙태가 성행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지요. 2005년 전국 201개 병의원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아마도 연간 34만여건의 임신중절이 이뤄지고 그 중 약 4.4%인 1만5천건만이 법적으로 허용된 임신중절이라고 합니다. (출처 https://www.mdtoday.co.kr/mdtoday/index.html?no=101576

이 기사를 보면서 느낀 점은 산부인과의사들이 진작 나서야 하는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찜찜해하면서도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남들도 다 하는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불법낙태를 하던 지난 날을 반성하고 자정운동을 한다는 것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한편으로는 이런 방법만으로 불법낙태를 막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떨칠 수가 없습니다.

15년전쯤..제가 대학병원의 전공의 4년차 때 일입니다. 내과전공의 4년차가 번갈아가며 들어가는 일반진료시간이었지요. 20살 여성이 요즘 소화도 안되고 위가 불편하다고 오셨습니다. 마지막 생리일을 물었더니 2달전...그러데 본인은 원래 생리가 불규칙할 뿐더러 성관계도 없었다고 합니다. 진찰을 하고 위검사와 혈액검사들을 처방하고 내 보내려는데 뭔가가 찜찜합니다? 검사의 목적을 말하면 화를 내고 거부할까 봐 그냥 소변검사만 먼저 하고 결과 보고난 후 다른 검사 진행하자고 하면서 소변으로 임신반응검사를 보냈습니다. 얼마 후...아니나다를까 정말 임신반응검사 양성. 알고보니 그 환자는 입덧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실을 환자에게 알려준 다음이 더 황당했습니다. 그 환자의 말인즉, 자기는 남자친구와 같이 잔 적은 있지만 성관계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술을 많이 먹고 정신을 잃은 적도 없고...눈을 쳐다보고 대답을 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임신이 되는 건지 전혀 모르는 듯한 얼굴. 그렇다고 세세히 그 과정을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정말 우리나라의 성교육이 잘못 되어있나보나...라는 생각만 했더랬습니다.


이 환자도 그랬고...그 다음 전문의가 된 다음에도 젊은 여성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것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제 기억에는 그 환자들이 물어본 첫 마디가 "수술...되나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임신중절이 가능을 하겠냐는 뜻이었지요. 물론 제가 있던 병원에서는 불법적인 임신중절을 하지 않는 원칙이 있는터라 "안 됩니다"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 환자들은 어디에선가 분명히 임신중절술을 했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입니다.

사실 아무 대책도 없이 덜컥 임신이 된 미혼모, 그것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남자친구가 아이를 키울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생명은 소중하니 아기는 낳아야한다? 당연한 말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경제적인 능력도 없는 미혼모에게 그걸 강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임신을 진단했던 몇 명의 미혼모들도 그런 상황이었고 "여기서는 안됩니다"라는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조언을 해 줄 수도 없었구요. 그러니 제 대답은  "이 병원에서는 불법으로 임신중절을 하지 않으니 (불법낙태가 가능한) 다른 병의원을 찾아보세요.."라는 말과 다름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미혼모들의 불법낙태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미혼모에 대한 그리고 태어난 아기에 대한 사회적인 구제대책이 있어야 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의 분만전 필수검사와 분만비용의 전액 국고지원이라든지 부모가 태어난 아기의 양육을 포기할 때에 대한 아기의 양육계획이라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미혼모들에게 어떤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지 그냥 무턱대고 임신중절을 해 주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정말 이런 경우 아무도 임신중절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무면허 돌팔이에게 낙태를 맡기거나 이상한 약물을 먹고서라도 낙태를 시도하려고 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지금도 어느 의사들은 그런 논리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래도 어차피 할 것이라면 안전하게 병원에서 해 주는 게 나을 지도 몰라.." 제 생각에도 이 말이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는 논리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불법낙태가 미혼모에게만 있는 일은 아니겠습니다. 요즘에는 많이 줄었지만 원했던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고 낙태를 하는 경우도 있고 원치 않았던 임신이라고 (정상적인 가정인데도..) 낙태를 하는 일도 있지요. 그렇지만 이런 경우라면 그냥 엄격히 규제만 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낙파라치"가 유용할 수 있는 경우이겠지요.

요약을 하자면...불법 임신중절(낙태)를 줄이기 위해서는

1. 제대로 된 성교육 (피임을 포함해서)이 필요합니다.
2. 불법임신중절을 하지 않겠다는 산부인과 의사 및 병의원의 결연한 결의
3.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을 위한 사회적인 배려, 보호시스템
4. 이러한 경우 태어난 아기의 보육 시스템

이 필요하다는 것 입니다. 1,3,4번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산부인과의사만의 결의로는 아무래도 반쪽의 효과밖에는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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