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eticsMode 김아랑 대표

다운증후군 환자, 다운 환자, 다운아. 암 환자. 

우리가 당연시하며 쓰고 있는 이 말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전상담 대학원 첫 수업 시간에 알게 되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배울 것이라 기대했던 나는, 유전상담학 첫 수업 시간에 “언어의 잘못된 사용“을 배우게 된 것이 왠지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교수님들의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어가 우리의 삶을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이름을 갖게 되면, 그 이름으로 불리며 그 이름에 맞게 쓰이고 살게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학교나 병원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그에 맞게 행동도 조신해야 하고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는 반면, 친구들과 “야!”라고 부르며 놀 때는 그 “야”라는 말에 부합하게 내 철없던 어린 시절의 모습 그대로 마음 편히 놀게 된다.

UCLA 소아유전학과에서 일할 당시, craniofacial clinic에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그 클리닉에 몇 년째 오던 아이가 있었는데, 한국인 유전상담사가 있다는 말에 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 아이의 부모님께서는 그 동안 영어로는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물어보시며 나와 좋은 라포를 쌓았다. 그때 당시 영어로만 오랫동안 일을 해서, 한국말로 된 의학용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아침에 커피를 못 마신 채 클리닉에 들어가서 등등의 이유라고 변명을 늘어놓고 싶은 일이 생겼다. 아이의 구순구개열 히스토리를 얘기하는데, 나는 그만 “언청이“라는 단어를 써버린 것이다. 말을 내뱉고는 가슴이 철렁. 어떻게 수습해야 되지 생각하며 얼굴이 빨개진 나를 보고 아이의 어머니께서는 “구순구개열 말씀이시죠?”라며 괜찮다고 이해해 주셨는데, 그 괜찮다 하시는 얼굴에 배어 있던 씁쓸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다. 용어를 검색하고 들어갔어야 했는데…

같은 증상 혹은 같은 뜻을 가진 용어라고 해도 그 말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쓰이는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다운증후군 환자(다운 환자, 다운아), 암 환자.

“이게 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줄 안다. 조금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다운증후군 환자(Down syndrome patient)” 혹은 짧게 “다운 환자, 다운아”라고 부름으로 인해 이 환자는 다운증후군과 동일시된다(“환자 = 다운증후군”).

하지만 “다운증후군이 있는 환자(patient with Down syndrome)”라고 부르면 이 환자는 다운증후군으로 진단된 환자일 뿐, 환자 자체가 다운증후군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암 환자“도 “암이 있는 환자”라고 부르면 “환자=암“이 아니라 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된다. 처음에는 “~이 있는”이라는 말을 조금 덧붙여 사용하는 것이 여간 입에도 안 붙고 부르기도 너무 긴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요즘은 짧은 말도 줄여 쓰는 세상 아닌가. 정말 사소해서 미미하게 여겨지는 차이라고 해도 이런 작은 차이가 환자와 가족분들께는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한동대학교 교수님이신 이지선 교수님께서는 23살 때 음주운전자가 낸 교통사고로 중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수술을 이겨 내셨는데, 예전에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셨던 말 중에 지금은 교통사고를 “당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교통사고를 “만났다”라고 표현한다고 하셨다. “당했다”라고 하면 계속해서 피해자가 되는 느낌이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만났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과거의 한 사건으로부터 회복하고 그 시간을 잘 흘려 보내기 위해 이지선 교수님께서는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 언어들을 바꿈으로써 극복하셨다. 

우리가 보는 환자와 가족들이 진단받은 그 질환을 인정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전상담을 잘 할 수 있는 첫 걸음이 언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말에 “아“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정말 사소한 것일 수 있지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그런 단어들이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상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바꾸려는 노력이 우리의 진심을 만나면 환자와의 관계에 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아랑 GeneticsMode 대표는 University of Cincinnati 대학원의 유전상담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2015년 미국 유전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졸업 후 Genetics Center, UCLA Pediatrics Genetics, Sema4 등 다양한 곳에서 산전진단 및 소아 및 성인 유전상담사로 근무했다. UCLA Pediatrics Genetics에서는 NIH 펀딩을 받는 대사질환 연구 코디네이터로도 일 했다. 현재는 미국에 GeneticsMode라는 온라인 유전상담 및 유전상담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유전상담학을 가르치며 후배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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