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에게 있어 숙주는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할 수 있다. 숙주는 기생충에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먹고 살
자리를 마련해 주지만, 기생충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릴 경우 숙주는 기생충이 다음 세대를 시작하기도 전에 죽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기생충이 성장과 번식의 효과를 최대화 하기 위해서는 숙주에게서 가능한 많은 자원을 빼앗아와야 한다. 동시에 숙주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다. 때문에 기생충이 주로 선택하는 전략을 바로 바로 당장의 생존에는 필요치
않은 숙주의 생식력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다. 즉 숙주를 거세시키는 것
이다.

기생충이 직접 숙주를
거세시키는 것인지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이후 숙주의 생식력이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이 현상이 기생충이 직접적으로 숙주의 생식력에 영향을 미친 것인지, 아니면 기생충 감염으로
인해 숙주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해져 숙주의 방어기전의 일환으로 생식에 사용되는 자원 소모를 자체적으로 감소시킨 것인지
구분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기생충들이 기생거세(parasitic castration)을 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기생거세자들의 신상명세. 이 리스트는 기생거세자들의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1)


생거세 현상은 기생충학에서도 그렇게 주목받는 분야는 아니었다. 의/수의 기생충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기생거세 현상은 비교적
드물고 그 중요성도 낮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연히 기생거세 자체가 흔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서 발견된 전체 150종의 병원체 중 20% 가량이 기생거세 현상을
일으킨다고 보고했다. 생물량으로 따지더라도 절대 적은 수준이 아니었다. 1헥타르 당 약 3-11kg의 기생거세자들이
발견되었는데, 갈매기 같은 상위 포식자들의 무게를 한참 넘어서는 수준이었다.(2) 위의 테이블에도 나타나듯 기생거세자들은 세상
곳곳에서 지금도 암약하고 있다.

기생거세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숙주의 몸을 파먹어나가는 기생말벌의 경우에는
직접 숙주의 생식기관을 파먹어 거세시킨다. 이렇게 생식기관을 제거시키는 과정에서 단순히 생식력을 제거하는 효과가 나타날 뿐만
아니라 숙주의 발달 자체를 억제시켜 더 많은 자원을 기생충이 착취할 수 있게 된다. 곤충을 감염시킨 월바키아처럼 수컷을
여성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월바키아의 경우 어미에게서 알로 수직전파 될 수 있기 때문에 숙주가 수컷인 경우 보다는 암컷인 경우가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톡소플라즈마나 헤르페스처럼 불임을 일으키거나 임신 중 유산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현상이 기생충의 자원약탈을 위한 하나의 전략인 것인지, 아니면 기생충 감염에 의해 일어나는 다양한 증상 때문에 일어나는
후폭풍인지는 아직 논란이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독특한 형태의 기생거세는 바로 중간숙주를 거세시킨 후 행동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이다. 이 경우 단순히 자원약탈의 효과를 최대한 얻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최종숙주에 이를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획득할
수 있다. 흔한 방식은 아니지만, 흥미를 자아내는 대목이다.(3)

그렇다면 기생거세가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기에
기생충은 이런 잔악무도한 짓을 거리낌없이 저지르는 것일까. 일단 숙주의 몸 안에서 생식기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결코 작지 않다.
크기와 생활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약 5-15% 가량의 몸무게를 생식기관이 차지하고 있다. 숙주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이 비율은 높아진다. 거세를 통한 자원의 이득은 단순히 이 생식기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거세를 통해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성징과 짝짓기에 소모되는 자원을 억제하는 것 역시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다. 자손을 낳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엄청난 자원과 자손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으로 인한 숙주의 사망 위험성 역시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낭비'다. 생식력
저하가 가져오는 효과는 놀랍다. 기생거세를 당한 숙주는 다른 비감염자들에 비해 몸 크기가 커지는 경향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즉
기생충이 대량의 자원을 착취하더라도 거세를 통해 남아도는 에너지가 남아돌아 거대화를 불러 온다는 이야기.(4)

기생거세로
얻는 이득이 그러도 크다면 왜 모든 기생충이 숙주를 거세시키지 않을까. 이는 기생충이 가지는 몇가지 물리적 한계와도 연관이
있다. 일단 기생말벌 같은 경우에는 숙주의 생식기를 직접 먹어치우는 단도직입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지만, 일부 기생충의 경우에는
숙주의 생식기에 물리적으로 도달하기 힘든 입장에 놓여있을 수 있다. 혹은 호르몬 등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숙주를 거세시키는
경우, 기생충 보다 숙주의 크기가 훨씬 거대하다면 그 효과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숙주의 몸 크기가 커질 수록 몸
전체에서 생식기관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기생충이 꼭 생식기관을 공략할 필요성이 낮아지는 것도 한가지 이유가 되겠다.

아마 기생거세가 주로 몸 크기가 작은 무척추동물들에서 주로 나타나고, 인간 처럼 커다란 생물에게서는 비교적 찾아보기 힘든 현상인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추측된다. 반대로 숙주의 몸 크기가 작다면 생식에 소모되는 에너지도 커지게 마련이고, 마지막 한 톨의
자원까지 앗아가려 노력하는 기생충의 입장에서 생식기관은 매력적인 목표물이 된다. 숙주의 수명이 짧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수명 자체가 짧다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벗겨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벗겨먹는 것이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된다. 때문에
딱히 거세를 노린다기 보다는 닥치는대로 파먹는 과정에서 숙주의 생존에 당장 상관이 없는 생식기관부터 먹어치우게 되었다는
설명이다.(5)

앞서 잠시 언급했듯, 기생거세와 함께 중간숙주의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다. 기생충에 의해 완전한 거세가 이루어진 시점에서 숙주의 유전자는 사실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게다가 기생충에 의해
행동까지 조절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 숙주를 기생충의 '확장된 표현형(extended phenotype)'으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숙주는 겉보기에는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비감염자들과 별 다를 바 없지만 실제로는 기생충의 외피이자 영양공급원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고, 폭넓게 보자면 기생충 집단에 속한다 볼 수 있다. 결국 숙주라는 껍데기가 내어놓는 유전형은 기생충 뿐이기
때문이다. 기생거세는 그 메커니즘과 중요성이 이제야 그 베일을 벗고 있다. 앞서 전개한 가정은 일견 극단적이지만,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를 새로운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된다.

Reference:
1.
Kevin D. Lafferty, Armand M. Kuris. (2009) Parasitic castration: the
evolution and ecology of body snatchers. Trends in Parasitology.
Articles in Press.
2. Kuris, A.M. et al. (2008) Ecosystem
energetic implications of parasite and free-living biomass in three
estuaries. Nature 454,
515518
3. Hechinger, R.F. et al. (2008)
Diversity increases biomass production for trematode parasites in
snails. Proc. R. Soc. Lond. Ser. B Biol. Sci. 275,
27072714
4.
Hall, S.R. et al. (2007) Parasitic castration: a perspective from a
model of dynamic energy budgets. Integr. Comp. Biol. 47, 295309
5.
O’Keefe, K.J. and Antonovics, J. (2002) Playing by different rules: the
evolution of virulence in sterilizing pathogens. Am. Nat. 159, 597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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