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의 강양구기자의 서평은 독특한 데가 있습니다. 하바드대학의 존 벡위드 교수가 쓴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는 강양구 기자의 서평에 끌려 사게 된 책입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1118672).
강양구기자가 소개하는 것처럼 벡위드교수는 과학자이자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합니다. 흔히 실험실에서 연구에 쏟는 시간이
부족하여 잠을 줄이고 개인생활을 희생하는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만, 연구하는 시간을 쪼개서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강양구기자는 벡위드가 사회운동에 눈을 돌리게 된 배경역사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벡위드가 젊은 시절을 보낸
1960년대 미국의 대학가는 ‘대항문화’가 거세게 끓어올랐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철학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벡위드 집안의 내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벡위드의 삼촌과 숙모는 좌파였다고 합니다. 눈초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만, 그의 삼촌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주장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화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벡위드교수는 1969년 대장균 박테리아에서 유전자를 순수하고 완벽하게 분리하는데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기자회견을 통하여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과학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성과로 유전자를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하는
상황과 같은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결정에 대한 통제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벡위드의 과학자로서 충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배경에는 과학적 성과가 인간에 대한 차별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로 오용되어 온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잘 못되었다는 그의 인식에서 출발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나치독일의
아리안족 우월주의와 유약한 체질을 제거시켜야 한다면서 인종청소를 강행한 사실 등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유전자를 겨우 분리해낸 상황에서
유전자를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하는 일이 금방 가능하겠느냐는 견해였는데, 결국은 5년 정도 지나서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한 생물의 유전자조각을 끄집어 내어 다른 생물에 이식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벡위드교수는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이라는 급진주의 단체를 통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맨하탄 프로젝트의 산물인 원자폭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핵물리학의 성과가 살상무기로 개발되어 무수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을 종료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 위력에 놀란
인류는 핵폭탄의 사용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지전은 지속되고 있지만, 핵을 사용하는 상황은 서로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과학자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인류를 위하여 옳은가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여한다면 벡위드교수처럼 열성적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도 같이 생각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제각기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몫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학자는 학문에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에 각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벡위드교수 역시 사회운동에 간여하는 기간에는 연구에 소홀하여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벡위드교수가 자신의
사회운동에 대하여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무정부주의자들, 맑스주의자들, 이념적 성향은 없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진 과학자
등등 다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특정한 성향에 대하여 무비판적인 환호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을 무렵의 상황에 대한 벡위드교수의 생각은 새겨둘만 합니다.

 

“나는 비록 우리가 니카라과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사회운동을 지원한다고 해도 비판이 필요한 경우 우리 역시 비판에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작 배웠어야 했다고 느꼈다. 이러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은 미국 내에 있는,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원했던 사회운동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들의 상황이 자신들이 믿었던 만큼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실망의 결과는 종종 운동 자체에 대한 이반으로
나타났다.”

 

덤으로 얻은 소득입니다. 벡위드교수는 상당한 페이지를 에드워드 윌슨이 주창한 ‘사회생물학’ 비판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연전에 읽고 상당한 느낌을 받았던 책 ‘통섭’의 저자이기도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4895225). 이 이론은 책을 번역하여 소개한 최재천교수에 의하여 도입되었는데, 최근에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이라면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일독을 권합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