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 생활의  시작

  제가 경기도에서 살다가 남편의 고향인 충남 부여로 이사를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되어 갑니다. 큰아들이 몸담고 평생직장이라며 아침부터 늦은 시간 까지 일하던 회사가 IMF때 경리직원이 돈을 빼돌려 도망가는 바람에 한순간에 부도가 났고 집은 은행에 넘어갔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는데 부여에 살고 있는 조카가 딱한 처지의 소식을 듣고 종산을 임대하여 지어놓은 조립식 주택을 무료로 살게 해주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호수로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겨울이면 얼어붙어 물을 길어와야 하고,

무일푼으로 돌아온 고향생활은 저희 가족에게는 막막하기만 하고 힘든 하루하루였습니다.

 남편이 마을의 농사일도 하고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갔으나 나이가 73세로 일을 시켜주지 않아 일도 많이 없는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내아들마저 허리디스크가 심해져서 일을 못하고 시골로 내려와 손자를 포함 4식구의 생활은 더 어려워 졌습니다.

큰 아들은 사업부도로 건설현장에서 하루하루 일당을 벌어 생활하고, 둘째 아들도 며느리와 이혼 한 후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어 월세를 낼 돈이 없어 걱정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딸도 장사를 하다가 형편이 어려워져 신용불량자가 되어 자녀 셋을 키우며 살기에 쌀이 떨어져도, 몸이 아파 병원에 갈 돈이 없어도 어느 누구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기도에서는 부녀회장을 하면서 동네일도 도맡아 하고 성격도 쾌활하고 밝았는데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니 몸도 마음도 편안하지가 않고 성격도 우울해졌습니다.


□ 내 몸 속에서 자라는 암

  나는 굉장히 참을성이 많았습니다..

아니 정말 미련하고 미련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었다니, 내 몸속에서 암 덩어리를 키우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평소에 가끔씩 배가 살살 아파도 이러다 말겠지 하고 지나쳤고, 변비가 있고, 가끔씩 어지럽기도 하였으나 병원을 찾기는커녕 무심코 흘려 지나갔고 소화 가 안 되고 쓰리면 위궤양 약을 지어다 먹었습니다. 몸무게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3일 동안 밥을 먹지 못하는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와 같이 배를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 오죽하면 만오천원을 주고 택시를 타고 부여에 있는 성요셉병원에 갔습니다. 성요셉병원을 가서 사진도 찍고 검사를 하였는데, 의사선생님은 여기서는 치료를 할 수가 없으니 대전에 있는 큰 병원에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건양대학교병원에서 일주일을 입원하여 검사하고 나니 대장암 3기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노란해지며 가슴이 터질 것만 갔더군요. 먹기 살기도 바쁜데 수술할 돈을 구할 길이 막막했습니다.

  병원에는 가지도 못하고 면사무소를 찾아가 사정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2006년 6월 22일자로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이 되어 의료급여 2종 카드가 나왔고 월40여만의 돈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디스크 치료비로 12만원을 가져가면 네 식구의 생활비로도 부족한데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2006 년 8월 7일에 대장을 잘라내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고 앞으로도 5번에 걸친 항암치료를 더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척들에게 손을 벌리고 달러이자로 급전 150만원을 얻어 치료비를 내고 1개월 만에 퇴원을 하였습니다. 퇴원을 하고 났어도 가슴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돈도 없고 앞으로 항암치료 받을 생각을 하니 살 의욕이 없었습니다.


□ 내 삶에  희망을 준 한통의 전화

  무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내 삶에 희망을 준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 김옥자 씨 댁이죠 여기 oo보건소인데요, 아주머니 혹시 지금 병원치료 받고 계신가요

  -그런데요.

하고 대답을 하였더니 언제 어떤 진단을 받았는지, 언제 수술을 받았느냐며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암치료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아주머니는 지원대상이 된다고 진단서, 의료급여증, 치료비 영수증, 통장, 도장 등을 가지고 보건소에 들르라고 하면서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도 띠고 치료비 영수증도 챙겨서 oo보건소에 들렸더니 혈압도 재주고 밥은 잘 먹는지, 통증은 없는지 이것저것 자세히 묻더군요.

암 환자 중 의료급여 2종 수급자는 220만원까지 치료비 지원이 가능하다고 설명하면서 ‘이번에 치료비 지원받고 다음번 항암치료비도 조금 더 지원 해드릴 수 있으니 치료비 영수증을 잊지 말고 챙겨오세요’ 라는 말과 함께 차근차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서류를 살펴보더니 '맞게 챙겨오셨네요 하면서 아주머니 항암치료 받으시며 버스를 타고 군보건소까지 가시기 힘드니까 서류는 제가 갖다 낼께요'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서류 심부름 까지 시키느냐고 했더니 집에 가는 길에 내고 가면 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주머니 건강 잘 챙기세요 라는 위안의 말도 함께 덧붙였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마음속으로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두 번째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주머니 oo보건소인데요, 군보건소에 확인해보니 지난번에 신청하신 병원비 아저씨 통장에 입금 되었다고 하니까 한번 확인해 보세요. 꼭 병원비로 쓰시고 다른데 쓰면 안돼요. 아주머니 지금은 암치료가 우선이니까 다른 걱정은 마시고 치료에만 신경쓰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게 신경을 써주니 말입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집에 와서 통장을 확인해보니 1,757,800원이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150만원을 찾아 급전으로 얻은 사채빚을 값고 나니 몸은 불편하고 아파도 마음은 날아갈 것 같이 후련하였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무섭고 각박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제 생전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제는 살 의욕이 생긴답니다. 이번에 3번째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항암치료를 처음 받을 때보다 견디기가 점점 더 어렵습니다. 입안은 온통 다 헐고 짓물러서 먹을 수가 없고 조금 먹고 나면 속이 메스꺼워 다 토해나고 맙니다. 항문이 뒤집어져서 쓰라리고 아프고......

  그러나 자식들이 조금만 참아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지들이 돈벌어서 엄마 치료비 댈 때까지 조금만 참아 달라고.......

 둘째딸은 엄마 항암치료 받고 힘드니까, 집이 좁고 불편하더라도 당분간만이라도 집에 가서 지내자고 졸라댑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치료비를 지원하고 위안을 주는 보건소 직원의 고마움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참을 랍니다.

  가끔씩 보건소에서 찾아와 건강체크도 해주고 영양제도 주고 갑니다. 암으로 고통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어 이중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저 말고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같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치료비를 지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은 국가에서 무료로 암검진을 해준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미련하지 않게 국가에서 해주는 무료검진을 받아 암을 키우지 말고 일찍 발견해서 고생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암에 걸려도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국가암정보센터 암 체험 수기 공모전 수상작, 김옥자님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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