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희망에게' 김혜정

2000년 캐나다로 이민 간 작가 김혜정이 이민 10개월 만에 큰아들 설휘가 뇌종양을 진단받고 나서 치료받는 과정을 쓴 일종의 투병기이다.
책 제목도 진부하고
사실 투병기의 담론구조는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은 투병기라고 보기엔
글쓴이가 다큐멘터리 작가라서 그랬을까?
엄마와 가족의 심정, 투병의 어려움, 극복을 위한 노력 등이 잘 묘사되어 있는 것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캐나다 의료시스템의 차이, 장단점이 잘 분석되어 있는 보고서였다.
그녀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환자를 위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유방암 수술 후 항암치료를 시작한지 9일 만에 열이 나서 입원한 환자.
이 분은 한국 사람이지만 현재 캐나다에 살고 계시고, 한국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는 상태이다.
보험 적용이 안 된 채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다.
처음 만난 외래에서
캐나다는 의료비가 모두 무료일 텐데 왜 굳이 한국에 오셨냐고, 캐나다 의료시스템도 좋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환자는 검사와 진단, 치료가 결정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서 기다릴 수 없었다는 답변.
오시기를 잘 하셨다. HER2 양성은 빨리 수술하는 게 중요하다. 진행이 빠르니까.

앞으로 이 환자의 치료계획은
항암치료 한번 했으니 7번 남았고 - 뒤쪽 네 번에 투여되는 탁솔은 상당히 비싼 약. 보험이 안 되면 한번에 150-200만 원 정도.
HER2 수용체가 강양성으로 발현되어 있으니 1년간 허셉틴 - 허셉틴 1년 맞는 데는 약 5천만 원 정도.
부분절제술을 하였으니 방사선 치료 한달반 - 보험이 안 되면 700만 원 이상.
그리고 6개월에 한 번씩 추적관찰 및 관련 검사를 5년간.
(미국은 1년에 한 번씩 추적관찰 및 관련 검사를 하도록 권고하지만 우리나라는 6개월에 한번씩 하고 있다. 검사 및 진료비가 싸기 때문. 내 생각에는 6개월에 한번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함.)

이 비용을 보험 적용 없이 지불하면서 치료를 하려면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될 것 같다.
아침 회진에 가서 환자를 보니
열도 떨어지고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서 난 앞으로 치료계획과 비용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다행히 6월부터는 국내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할 것 같다고 한다.
- 이건 내가 잘 모르는 분야데, 아마도 한국인이면서 국내 체류기간 등 모종이 기준이 충족되면 다시 건강보험이 적용되나보다 -
환자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돈 걱정을 하며 진단과 치료를 늦춘 채 캐나다에 머물러 있지 않고
한국에 와서 수술과 치료를 시작한 것은 아주 잘한 선택이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용과 시간을 총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한국 의료시스템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나라는 검사, 수술도 빨리 할 수 있고
국제적 기준에 합당한 최신의 치료 약제를 보험으로 적용하는
좋은 나라 아닌가?
대답은 예스 아닌가?

예스? 예스? 노?....

암환자는 진료비의 5%밖에 안낸다.
그래서 혈압약, 감기약도 5%만 지불하고 약을 타간다.
그게 정말 한정된 파이를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내가
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의료사회학으로 전환하고
의료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의사가 되는 길에서 수없이 질문했던 질문들.

그런데 의사가 되고 보니
눈앞의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쉽지 않다.
눈앞의 환자만 보게 된다. 주위 환자를 둘러볼 틈도, 주위 사회를 둘러볼 틈도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뜻하는 대로
일을 할 수 없다하여 시스템의 허점을 논하는
그런 불평쟁이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직관력과 분석력은 사라지고
일상의 시계추를 허덕이며 아가기 급급하다.
이제 빨리 이 화면을 닫고 외래 진료실로 나가봐야겠다. 복잡한 생각은 덮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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