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선생님만 믿을게요.'

사실 환자가 이렇게 말하면 부담스럽고 싫을 때가 있다.
그렇게 전격적으로 의사에게 믿음을 주었다가  
자기 기대만큼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면
나쁜 결과의 모든 원인을 의사에게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 환자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환자가 쿨하게 굴고
나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부여하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그건 내 맘이 아니라 환자 맘이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런 부담스러운 눈빛 말고,
별 말 없이
나를 믿어주는 환자의 눈빛을 느낄 때가 있다.
그때의 부담은 훠얼씬 크다.
대체 내가 뭐 길래
나를 믿고 치료를 받겠다고 하시나...
나는 묵주반지를 끼고 다니지만 사실 기도를 그리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심이 깊지도 않다.
다만 뭔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기도를 꼭 하고 싶을 때
그 자주오지 않는 순간에 묵주반지가 도움이 될까봐 끼고 다닌다.

나를 믿어주는 환자의 눈빛을 느낄 때
나는 묵주반지를 손으로 굴리며
'내 힘으로 치료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지혜가 나를 통해 환자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 는
다소는 구태의연한 기도 문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히 부탁한다. 그것이 나의 기도이다.
제발 나를 좀 도와달라고, 지금 나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나는 내일 외래가 있는 날이면
전날 밤 외래를 예습한다.
미리 경과기록도 써 두고
환자 CT 사진도 다시 한 번 보고
예상되는 결과를 짚어보기도 한다.
내일 만날 환자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나에게 믿음을 주는 환자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런 내 마음을 환자들이 다 아는 게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환자와 함께 하는 블로그에
나의 사적인 감정과 의견을 적는 것이 의사-환자 관계에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코멘트를 해 준 적도 있다. 나도 고민 중이다.
다만
난 그런 환자들의 눈빛을 잊지 않는 의사가 되고 싶다.
매일 환자 진료 말고도 수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교육?
연구?
진료?
논문?
실적?
수익?
인간관계?
권력?
그런 풍파 속에 나는 나의 원래 빛이 바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래도 매일 밤 외래를 예습하면서 다짐한다.
그 눈빛들을 잊지 말자고...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