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세 할아버지.
신장암 폐전이.
만성신부전.
부정맥.
고혈압.
과거 뇌졸중.
조울증.

진단명만 늘어놓아도 몇 줄이다.
신장암에 대한 치료는 해도 그다지 효과가 별로 없고 안 해도 별로 나빠지지 않는 정도.
아마도 작년까지는 별 증상 없이 전신상태가 좋으셨던 것 같다.
항암치료는 그만 하자고 이미 결정한 상태. 항암제 치료를 하면 독성만 나타나서 고생이 많으셨다.

할아버지는 조울증이 심해 할머니나 자식들이 많이 지쳐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도 무슨 병이 많으신지 여기 저기 병원을 다니신다고 하는데
할아버지 대신 약만 처방받으러 오시곤 했다. 정작 할아버지는 최근 6개월 동안 병원에 오시지도 않고...
그냥 진통제랑 혈압약, 심장병약 등등의 약을 종양내과 일반외래에서 처방받아 가시기만 했다.
정신과약도 정신과 의사 진료 없이 일반외래에서 계속 타가고 계신 것이다.

작년 일반외래에서 만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아프다며 적으셨다는 통증기록을 나에게 가져와 보여주시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셨다.
통증 일기를 A4로 2장 넘게 적어 오셨다.

"할아버지를 한번 모시고 오세요."

요청 드렸다.
할아버지를 직접 뵙고 상태를 본 다음에 약을 어떻게 쓰는 게 좋을지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외래 오시는 게 힘들면 입원장을 드릴 테니 입원하시라고...
그래도 할머니는 약만 타가지고 가셨다.

그러더니 급기야 응급실로 오셨다.
어젯밤에 응급실에 오셨다는데
아침에 가보니 환자는 눕지도 못하고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안절부절못하고 계셨다. 숨이 차서... 환자의 안절부절은 매우 안 좋은 싸인 인데...

그런데 가만 보니
폐전이의 악화인지 폐렴이 생긴 건지 명확치 않다.
할아버지 얘기만 들어보면 임상적으로는 폐렴을 시사 하는 것 같다. 폐호흡음 소리도 그렇고. 심장도 많이 커졌다. 빈혈도 있고 신장 수치도 다소 나빠진 것 같다.
응급실에서는 항암치료 계획이 더 이상 없다는 기록에
밤사이 DNR(Do Not Resuscitation-연명치료포기서)을 받은 것 같다.

아침 의사 처방을 보니 DNR을 받아서 그런 건지 해야 할 검사를 하나도 안한 것 같다. 내가 외래에서 처방해 준 약들만 반복해서 처방이 나 있는 것이다. 새로 첨가된 약 하나도 없이...

4기 암환자는 결국 나빠지고 병은 악화되겠지만
병의 긴 코스 중에는 교정이 가능해서 어느 정도 회복시켜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때가 더 많다.
그런 것조차 4기 암환자라는 이름으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해서 환자를 도와주는 게 의사의 역할일 것이다.
그래도 안 될 땐 운명대로, 부르심대로 가야겠지만...

나는
통증도 다시 평가하고, 항생제도 쓰고, 수혈도 해주고, 소변검사도 하고, 심장초음파도 하고, 필요하면 CT도 찍어서 환자의 상태를 명확하게 규명하고 증상을 완화시켜주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치료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판단만이
윤리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의사마다 스타일이라는 것도 있고...
과한 검사, 과한 치료로
힘들어 하는 환자를 괴롭혀서도 안 되지만
회복 가능성이 있고 환자의 전신상태가 양호하다면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응답을 보이는 것이
DNR이 Do Not Response가 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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