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는 생각하기
나름..^^


그렇다. 스트레스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토요일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응급실로 찾아온 소뇌출혈 환자를 가볍게 입원시키고 당직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배가 고팠던 걸까, 신경외과 4월 인턴이자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얘정아'인 프랜시스는 맥도날드에서 치츠토핑을 가미한 더블쿼터 파운드 버거를 먹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다이어트 중임은 까맣게 잊은 채 그의 손에 붙들려 병원 밖으로 나갔다. 병원 수술복에 희 가운, 그리고 삼색 슬리퍼 차림 이였지만 오밤중에 필기왕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 차림 그대로 맥도날드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가시오가피 배송 건 이후에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급증하면서 문득 오늘은 콜라대신 건강음료를 즐기고 싶었고, 프랜시스와 나는 곧장 24시간 뉴코아 마트로 발걸음을 돌렸다. 흰 가운 차림으로 마트를 활보했건만 누구하나 눈길 주는 이는 없었다. 마트 내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타보기도 하고, 몰래 가판대에 놓여져 있었던 와인을 시음해보기도 했다. 목적은 건강음료였건만 주체할 수 없었던 쇼핑욕은 나와 프랜시스를 점점 악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급기야 장난감 코너에서 우리는 한 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온갖 장난감에 대한 토의, 토론, 질의응답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날이 신경외과턴 마지막 날이었던 프랜시스는 내게 선물이라며 장난감 한 상자를 선물했다. 비록 토이 스토리라는 영화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상자 겉표지에 그려져 있던 져그라는 악당은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장시간의 쇼핑을 마차고 맥도날드에 들렀다. 어린이용이라는 해피밀 세트를 30초 만에 가볍게 해치운 뒤 부록으로 얻은 도라에몽 후레쉬 장난감을 들고 킥킥거리며 애들처럼 좋아했다. 그 시각, 응급실로 찾아왔던 환자는 MRI 촬영을 완료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이전에 촬영한 CT와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한 후 보호자에게 결과 및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 당직실로 들어섰다.

시계는 새벽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장밋빛 주말 오프를 위해서 반드시 잠들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침대에 누웠지만, '죠니, 선물은 조립하고 자야죠. 선생님'이라는 말에 프랜시스와 레고 조립에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겨우 잠들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응급실에서 울리는 콜이 달콤한 잠을 깨웠다. 그 환자의 의식이 쳐지면서 동공반사가 없어졌다는 말에 응급실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하지만 재출혈과 그로 인한 급성 수두증 발생은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기관 삽관, CT촬영, 수술방 연락, 수술 동의서 설명, 보호자 설명 등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현실 속에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벽 5시 수술방으로 환자를 밀고 들어와 수술준비를 하던 찰나 심장 리듬이 늘어지면서 arrest가 발생했다. 마취과에서 달려오고 기계호흡 및 심장 마시지를 시행하였으나 환자의 바이탈은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수술도 진행하지 못한 채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게 아침나절까지 날밤을 새가며 힘든 주말 밤을 보내고 당직실에 들어서니 나를 기다리는 것은 창문 틈을 뚫고 들어오는 따가운 5월의 햇살과 조립된 레고뿐이었다. 이미 눈 10cm 아래까지 다크써클이 내려와 있고 얼굴은 검게 변해있었으며, 거울에 비친 그런 내 몰골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신경외과 전공의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지금의 만苦는 그저 시방 세계의 업보일 뿐, 내세를 위해 나무아미타불 정성의 불공을 드렸다. 불공 이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안식의 세계를 접하는 느낌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다, 스트레스는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명제가 다시 한 번 입증된 순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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