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쓸 때.
환자를 고민하면 졸다가도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보니
아직 마음이 '악'해지지는 않았나 보다.

밤이면 다음 날 외래를 예습하는데
- 외래시간에 환자 보며 의무기록정리하면 환자랑 눈 맞추기도 힘들기 때문에 미리 외래 기록을 거의 다 써두고, 외래에서는 간단하게만 몇 마디 적어야 함. 아직 그런 수준...-
매번 예습을 하지만 볼수록 뭔가 새로운 사항이 발견된다.
"아, 이 환자가 이런 게 있었구나. 내일 외래 때 무슨무슨 얘기를 해야겠다." 이렇게 써둔다.
사실 이러면 안 되고
한 번에 일목요연하게 다 꿰차고 있어야 우수한 의사일 텐데...
난 아직 조금 부족한 상태라는 걸 인정.

나름 환자들의 병뿐만 아니라
신상의 이모저모
환자의 특징
가족관계
이런 걸 조금씩 기록해놓고 그 환자의 상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가끔 다른 과 진료기록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환자와의 면담사항, 진료사항을 기록해 둔 걸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아주 명랑한 아주머니, 너무너무 긍정적으로 항암치료를 잘 받으셨다.
항암치료 6번 중 2번이나 열이 나서 입원하셨고
중간에 구토도 심해서 사시는 근처 병원에서 여러 날 입원도 하셨다.
그래도 다음 항암치료를 할 때가 되면 오뚝이처럼 컨디션이 회복되어
'이제 다 나았으니 또 항암치료 해야죠!' 라며 용기 백배셨다.
그녀의 남편은 젊어서 죽고 남은 두 아이 뒷바라지 하다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남편은 경제적 능력이 별로 없는데다가 지체장애 아들까지 데리고 들어와
자기가 그 식구들 다 먹여 살리고 지금은 그 지체장애 아들과 살고 있다는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의 강한 생활력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다 극복하며 즐겁고 밝게 사시는 분....

오늘은 한 할머니가
럭셔리하고 빳빳한 백화점 종이가방에 유명브랜드의 쿠키를 선물로 주고(던져놓고) 가셨다.
할머니는 그 쿠키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말씀도 잘 못하시고 평소 나와 그리 관계가 좋다고 볼 수도 없었다.
쿠키 상자에는 삐뚤빼뚤 글씨가 가득한, 꾸깃꾸깃한 메모지가 붙어있다.
자기한테 이렇게 뭔가를 많이 알려주고 잘 해 준 사람은 없었다고...
살면 얼마나 산다고 별 걸 다 가르쳐 주고 치료해주냐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 잘 안 듣고 검사도 잘 안하고 외래 오시라고 할 때 잘 안 오시는 할머니에게 잘 해드린 기억이 없다.

의사는 그런 지위를 점할 수 있나 보다.

의학적인 것도 아직 미숙
정신적인 것도 아직 미숙
날 믿고 치료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이런 내가 밉보이면
나도 조만간 법정에도 불려가고 고소도 당하고 그러겠지?
그래도 환자를 생각하며 맑은 머리로 진료하는 의사가 되어야겠다.
의사라는 이름으로 내 능력에 과분한 지위를 부여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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