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산업에 있어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IBM이라는 이름은 일종의 전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애플 II를 시작으로 하는 PC의 시대가 나타나기 전에는 말이다. 혜성같이 나타난 애플 II에 대항하기 위해서, IBM-PC를 내세워 80년대에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IBM은 진화를 하지 못하는 공룡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다양한 클론들과 워크스테이션의 등장,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철저히 밀려버린 운영체제 시장 등을 통해 거의 죽어가던 공룡을 살린 사람으로는 1993년부터 IBM의 지휘봉을 잡은 루 거스너를 꼽는다. 그러나 그가 공룡을 살린 방법은 수만 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마진이 많이 남는 시스템통합 및 서비스 시장, 그리고 서버 시장에 집중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변화는 사실 세계를 호령하던 IBM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것이었다.
 
그런 IBM의 뒤를 이은 CEO가 바로 현재의 CEO인 샘 팔미사노이다. 2003년 IBM이라는 거함의 선장이 된 그는 IBM이라는 회사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포지셔닝하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끌어가는 회사의 대명사로 바꾸어 놓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그도 루 거스너와 마찬가지로 비용절감을 위해 미국에서 하던 일을 상당부분 인도로 옮기는 등의 전략도 펼쳤지만, 무엇보다 혁신에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회사들이 할 수 없는 미래지향적인 사업에 집중투자를 하였다. R&D를 중시하고 세계 최고의 연구기관으로 IBM을 이끌면서 매해 수천 개에 이르는 특허를 통해 자연스럽게 하드웨어 기반의 컴퓨터 회사를 최고의 지식기반의 회사로 변신시키는데 성공한다. IBM의 이런 변신은 마치 커다란 공룡이 작지만 머리가 좋은 현생인류로 진화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샘 팔미사노는 볼티모어 출신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을 졸업하고 1973년 IBM에 영업사원으로 자신의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꾸준하고 성실한 직장생활을 통해 1990년대에는 글로벌 서비스를 맡게 되는데,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고객들과 만나는 시간으로 할애할 정도로 현장에서의 소리를 듣는 것을 중시했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도 매일 적어도 한 사람의 고객은 만난다고 한다. 또한, 출장을 다닐 때에도 어김없이 해당 도시를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이 매장에서 어떤 종류의 물건들을 사는지 유심히 살펴보면서 고객들의 미세한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샘 팔미사노는 언제나 단기적인 성과 이외에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을 중시한다. IBM의 연구자들과의 미팅에서도 항상 적어도 10년 이상을 내다보라고 강조하는데, 결국 미래를 바꾸는 장기적인 기술들이 IBM이라는 회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샘 팔미사노가 최근의 경제위기를 통해 IBM의 사명으로 삼았던 미션은 바로 “스마터 플래닛(Smarter Planet)” 이다. 네트워크와 컴퓨터 기술을 이용해서 건강의료, 교통, 에너지 등과 같이 현재 지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하게 풀어내야할 문제들의 해법과 같은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필요로 하는 기술개발 및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내놓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지식기반의 고수익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2010년 IBM은 46.1%라는 경이적인 총매출이익률(gross profit margin)을 기록하게 된다.

IBM이 주최하고 스폰서를 하는 스마터 플래닛과 관련한 스마트 시티 컨퍼런스는 최근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참석자들 모두가 느끼지만, 어떤 테크놀로지 회사가 자신들의 기술을 자랑하기 위해 여는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 이외에도 도시를 보다 살기 좋게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여러 연구자들이나 심지어는 기술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발표를 하고, 도시와 관련한 다양한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전력 그리드, 교통 인프라와 빌딩, 공장 등을 보다 효율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분석하고, 운영할 수 있는 방안들을 토의하며, 미래에 대한 그림을 다 같이 그려보는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효율적으로 적은 돈을 들여서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기에 필요로 하는 기술을 소개하고 필요하면 추가로 연구개발을 해야 하는 과제로 선정하는 작업을 많은 이들과 같이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1년에 한 차례, 팔미사노는 전 세계 7군데에 있는 IBM의 연구소장들과 함께 하루 종일 마라톤 토의를 가진다고 한다. 이 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떤 사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 것이며, 이런 새로운 미래가 온다면 회사의 전체적인 전략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려보는 것이다. 이 회의를 통해서 가끔은 경천동지할만한 엄청난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2년의 회의로 당시 회의에서 PC의 시대는 조만간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며, 센서와 스마트 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이기 때문에 IBM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 3년간의 준비를 거쳐서 결국 2005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IBM의 컴퓨터 관련 소비자 사업부문을 중국의 레노보에게 전격적으로 매각하는 대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애플의 아이폰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 2007년이므로, 무려 이보다 5년 전에 결론을 내리고 3년 만에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팔미사노 역시 세계적인 부자이지만 검소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거의 20년을 100년 된 코네티컷에 있는 오래된 집에서 살았고, IBM의 CEO가 된 이후에도 매일같이 자택에서 회사까지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면서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그런 그도 이제는 IBM의 수장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물려줄 것이라는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그의 나이가 60세가 되기 때문이다. 이미 후계를 위한 여러 움직임들이 가시화 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가 그의 뒤를 잇더라도 그가 이룬 공룡을 진화시킨 전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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