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범위는 상당히 넓고 광대합니다. 게다가 발전 속도도 너무나 빨라져, 유명 의학 저널만 구독하려고 해도 관심 가는 주제 이외에는 읽는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의학에 있어서도 수많은 정보를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의대생 시절 새 학기마다 구입한 두꺼운 책들을 보면서 '내가 이것을 다 알 수 있을까'란 생각과 의학이라는 학문의 무게감이 가슴을 눌렀던 것 같습니다. 특히 관련 문헌을 참고하기 위해 갔던 의학도서관의 수많은 의학 도서와 학술지들을 보면서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지요. 아마 의대생들은 한번씩 겪는 고민아닐까 싶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걸어다니는 교과서가 되고 싶었지만,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은 제 능력으로는 불가능이더군요. 최소한의 지식으로 시험을 패스하는데에 급급한 학창 시절이였던 것 같습니다. 병원에서 임상 실습을 할 때에는 교육을 담당한 고년차 레지던트 또는 교수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어떻게 저걸 다 외우고 있을까?'란 감탄과 동시에 비교되는 저의 알량한 지식에 한숨을 쉬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를 보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술기의 능력은 인턴과 레지던트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나아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학문적인 답답함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학술지를 구독하거나 새로 정리된 교과서를 구입해 읽어도 선배들이나 교수님들이 가진 지식의 폭을 따라가기엔 항상 부족했습니다. 습득한 정보의 양이 바쁜 수련 기간이기에 많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결정적으로 저에게 부족한 것은 Fact를 해석하는 능력이였던 것 같습니다.


매주 있는 저널 클럽시간에 새로운 의학 논문을 정리하여 발표할 때면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습니다. 인턴, 1년차 시절에는 연구자가 정리한 요약(abstract) 수준의 발표를 하기 마련인데 발표후에는 과거의 관련 연구들과 비교, 연구 방법의 오류가능성, 국내 데이터와의 비교 더 나아가 우리 병원 자료와의 비교등 미처 준비하지 못한 질문에 혼쭐나기 일쑤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루 하루 살아가기 버거운(?) 1년차에게 저널 준비 자체가 사치(?)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당시에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입원 퇴원환자 질병 통계, 퇴원환자 진단명등 리스트들은 지금은 전자의무기록(EMR)이 들어와 간편해졌지만, 당시에는 수십 수백명의 차트를 대출하여 작성하고 새벽에도 선배의 호출을 받고 부족한 정리에 대해 질타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내가 꿈꾼 의술인가란 생각에,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수련을 그만두겠다고 짐싸서 병원을 나왔던 적도 있습니다.


우여 곡절(?) 끝에, 대부분의 집나간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듯, 저 역시 고개 숙이고 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 고년차가 되어서는 병원내 책상 가득 교과서와 논문들로 가득차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더 똑똑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수많은 연구 결과들, 이러한 Fact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지는, 항상 자신없는 일이고 저같은 평범하고 경험이 적은 의사 혼자 힘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전에 이야기 했듯 의학이 과학의 범주안에 있지만, 인체에 대한 연구등에 윤리성을 유지하면서 과학적 근거를 찾는 학문이기에 실험실 연구 결과처럼 해석할 수 없는, 항상 고려해야하는 변수와 한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여타 현대 과학 연구들도 오류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각 개체의 특성, 환경의 변수를 통일할 수 없는 의학분야의 연구들은 더 많은 취약성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그렇기에 결과를 해석하는 능력이 더욱 필요한 것 같습니다.


4년차가 끝나갈 무렵에도 교수님들께서 컨퍼런스나 회진때 말씀하시는 다양한 Fact들에 대한 분석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하루종일 외래 진료와, 수술, 회진에 바쁠 텐데 어떻게 최신 연구들까지 섭렵하고 분석하는지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오랜기간 꾸준히 학문에 몸을 담고 또 여전히 최신 의학 서적이나 논문을 구독하며 여가(?)를 보내는 (모든 교수님이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열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교수님들도 Fact를 어떻게 해석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으신 것 같습니다. 최근 미국 의학저널 JAMA에 A Piece Of My Mind 란 코너 (의역하면 마음의 소리쯤?)에 뉴욕대학의 Harold W. Horowitz 교수의 기고문을 보면 이러한 고민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처음 교수가 되었을 때에는 학생들과 수련받는 전공의에게 중요한 Fact를 전달하는 일을 했었지만, 지금은 Fact를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에 대해 교육하고 있다라고 하며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The value of an education ... is not the learning of many fact, but the training of the mind to think of something that cannot be learned from textbooks"

"교육의 가치는 수많은 사실을 배우는 것뿐 아니라 교과서를 통해서는 배울 수 없는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다"

- Albert Einstein -

Source : Frank P. Einstein, His Life and Times, Cambridge, MA: DaCapo Press, 2002:185


요즘은 근거의학의 시대(era of evidence based medicine)이라고 합니다. 근거의학이 강조된 데에는 수많은 Fact들에 대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단순히 학문적 경향이 아니라, 근거의학의 중요성에는 환자의 권리와 의료 윤리 측면이 매우 큽니다. 근거의학을 중심으로 치료를 하도록 하므로써, 의료의 효용성과 안전성 그리고 의료진이 근거없이 자의적인 치료를 함으로 인해 환자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막게 된 것이죠.


일부 의사들 중에는 '경험적으로 분명히 효과가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가'라고 이야기 하며, 이러한 근거의학 중심의 치료방침이 때로는 치료에 효과적이지 않다고 하거나 여러가지 이유로 현실성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러한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 중 일부의 목소리는 모든 의사의 형편이 자신의 주장을 논문등의 연구 결과로써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오는 항변이기도 할 겁니다.


임상에서 수십년간 환자를 보며 축적된 경험을 단지 논문이나 기타 통계로 연구 결과를 쓰지 못한다고 환자에게 적용하지 말아야하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만, 환자중심의 의료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근거의학에 입각하지 않은 부분을 임상 적용하는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러한 치료를 받는 환자가 이러한 치료가 근거의학에 의한 것이 아니란 사실 조차 설명받지 않았다면 윤리를 벗어나 법적인 문제가 될수도 있겠지요.


근거의학(EBM)이 강조되면서, 항상 일정하지 않은 질병 상황과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직관적인 결정과 권한의 폭을 더욱 좁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환자 입장에서 본다면 의료 서비스의 안정성을 위해 많은 안전장치와 규제는 당연히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봤을 때 근거의학과 의료윤리는 앞으로 더욱 강조될 것이고 근거의학에 입각한 Fact의 해석과 치료는 당연히 의사로써 평생 해야할 일이된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환자는 의학의 학문적 사실에 입각해 치료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1) Fact 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신뢰성(evidence)이 낮은 Fact를 가지고 상업적 이윤을 추구해 의료를 제공하는 것

2) 상업적이지 않고, 환자로 하여금 비용을 지출하게 하지 않더라도 제대로 된 의학적 Fact에 입각해 치료를 하지 않는 것


위의 두가지 경우는 사실 같은 경우입니다. 의료 제공자가 이윤을 추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의학적 사실에 입각해 치료하지 않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1)번의 예에 대해서 만 알고 있고, 2)번의 경우에는 비용을 발생시키지는 않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가지 모두, 환자 입장에서 판단한다면 비윤리적인 일입니다.


전문가들 조차 하기 힘든 Fact의 분석을 비전문가들인 환자가 할 수 없기에 근거의학에 입각한 치료는 의료 소비자로써 요구해야할 당연한 권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반인들 뿐 아니라 많은 의료인들 심지어는 일부 의사들 조차도 이것이 환자의 권리와 의료인의 윤리에 맞닿아 있다는 인식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이러한 Fact의 해석과 토론은 대학등 학문을 연구하는 기관이나 학회에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이러한 학술적 토론이 지속적으로 웹을 통해 이뤄지는 시점이 오기는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많은 학술 정보와 강좌가 웹으로 이미 서비스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의료메타서비스를 이용해 학술적인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 보편화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의료 정보는 과거에 비해 더 많이 대중에 제공되고 있으며, 머지 않은 미래에는 환자들이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의료를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치료에 임하지 않으면 많은 소송에 휩싸이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의사로써는 그리 유쾌한 상상은 아닙니다만,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헬스로그를 구독해주시는 모든 분들은 의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현명한 의료 소비를 하실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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