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감기' 뇌전증, 사회적 차별 여전…"뇌전증관리지원법 제정돼야"

[페이션트 스토리] 한국뇌전증협회 허도경 이사

2024-05-31     김경원 기자

뇌전증은 하나의 병이라고 말하기 어려울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는 뇌질환이다. 흔히 뇌전증이라고 하면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경련하는 질환으로 생각하는데, 모든 뇌전증이 이와 같지 않다. 의식을 잃지 않고 입꼬리가 당기는 형태로 가끔 나타나는 경한 뇌전증도 있고, 돌연 의식을 잃은 채 경련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하는 심각한 뇌전증도 있다. 뇌전증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뇌전증은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고, 인구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우리나라는 뇌종양, 뇌졸중 등의 이유로 고령 뇌전증 환자가 크게 늘 것으로 예측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국내 1만 명 당 38.4명꼴의 유병률을 보이는 '뇌전증' 환우 대부분은 자신의 병을 극도로 숨긴다. 당뇨병·고혈압을 앓는 환우는 자신의 병을 이처럼 숨기지 않지만, 뇌전증 환우는 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부정적 인식 탓에 음지로 곧잘 숨는 것이다. 

뇌전증환우부모모임 '빵아빵아'의 대표이자 성인뇌전증환우모임 '뇌전증과 함께'의 공동 리더인 한국뇌전증협회 허도경 이사(53세)는 "뇌전증 환우와 가족은 무엇이 부끄러운지 꼭꼭 숨어 산다. 그 부끄러움을 만든 게 우리사회"라며 "뇌전증은 혐오스러운 병이 아니라 뇌에 스파크가 일어 몇 초에서 몇 분 아프고 괜찮아지는 병"이라고 말했다. 허 이사는 뇌전증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 '뇌의 감기'라고 정의한다. 

한국뇌전증협회 허도경 이사

'뇌전증'이 '뇌의 감기'라면 갑자기 나타나는 '뇌전증 발작'은 뇌의 감기 증상으로 나타나는 '뇌의 기침'에 비견된다. 돌연한 뇌의 크고 작은 기침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놀랄 수는 있지만, 그것이 혐오스러운 일은 아니며 우리사회에 못 섞일 일도 아니다. 물론 뇌전증에 대해 잘 몰랐던 허도경 이사도 심각한 뇌전증으로 꼽히는 레녹스-가토스증후군을 앓는 아들을 처음에는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게 쉽지 않았다. 

허 이사는 임신 7개월에 갑작스러운 양수파열로 아들을 낳았다. 첫 병원에서 출산이 지체돼 병원을 다른 곳으로 옮겨 아이를 낳았는데, 그때는 이미 산소부족으로 아이에게 뇌손상이 심각하게 진행돼 있었다. 태어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분명 달랐다. 보통 생후 100일이면 가누는 목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생후 3~4개월이면 가능한 몸 뒤집기도 잘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뇌전증은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허도경 이사가 두 눈으로 아들의 뇌전증을 최초로 확인한 건 생후 10개월쯤이었다. 그녀는 "감기가 와 열이 올라가면서 경련을 하는데, 기본 5분 이상 경련이 짧게 짦게 계속됐다. 가까운 소아전문병원에 갔는데도 아이의 경련이 멈추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녀는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로 아이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병원을 거쳐 최종 세브란스병원에서 아이는 뇌전증에 뇌병변영구장애 진단까지 받았다. 

허 이사는 "그때는 병원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줄기차게 병원을 다니기만 했고, 경련하는 아이를 숨기기 급급했다. 마트를 가더라도 밤에만 가고 누가 볼까봐 아이를 꽁꽁 싸매고 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의 병에 대한 이해 없이 숨기는 게 삶의 해법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체득했다. 그 결과 허도경 이사는 온라인 뇌전증환우부모모임 '빵아빵아'를 개설했다. 2002년의 일이었다.

허도경 이사는 "소통이 필요했다"며 "나 같이 아이 병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이야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그때의 심정을 말했다. 빵야빵야 오픈 뒤 그녀는 뇌전증으로 고통받는 아이와 가족이 한국사회에 적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깨달음은 아이의 병에 대해 이젠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줬다. 그때부터 그녀는 의사를 붙들고 하나하나 설명을 요구했다.

입원기간 내내 의사에게 매일 설명을 요구할 때도 있을만큼 허 이사는 아들의 병에 대해 깊숙히 파고 들었다. 그것을 다른 뇌전증 환아 부모들과 공유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아이 주치의에게 병에 대해 물어보라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소천한 아들을 23년간 키우면서 알아낸 많은 정보를 허 이사는 지금도 2개의 성인환우모임과 환우가족모임 사이트에서 나누고 있다.

또한 뇌전증협회가 뇌전증 환우와 가족이 질병 탓에 불이익을 받지 않는 사회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양하게 추진하는 정책사업과, 약제비·수술비 지원 같은 복지사업, 자조모임지원사업, 뇌전증 인식개선캠페인 등에 허도경 이사는 환우·가족과 뇌전증협회의 가교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뇌전증 환우와 가족의 생생한 목소리를 모아 뇌전증협회가 추진하는 정책사업에 힘을 싣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일이 심각한 형태의 뇌전증으로 알려진 '드라벳증후군'이나 '레녹스-가토스증후군'의 발작치료에 쓰이는 희귀의약품 '에피디올렉스'에 대한 보험 급여 추진이었다. 허 이사가 뇌전증협회와 함께 보건당국에 환우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전달한 결과, 에피디올렉스는 2021년 4월부터 국내에서 급여가 이뤄졌다.  

에피디올렉스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 현재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데, 급여 전 1병에 230만원가량에서 급여 뒤 12만~13만원으로 약값이 크게 낮아졌다. 허도경 이사는 "어떤 환자는 한 달에 1병을 쓰고 어떤 환자는 석 달에 2병도 쓸 수 있는 약인데, 효과는 너무 좋지만 너무 비쌌다"며 "이 문제를 뇌전증협회와 환우단체가 같이 나서면서 비교적 빨리 해결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올해 4월엔 에피디올렉스 처방을 위한 서류 작업에 드는 비용도 추가적으로 낮춰졌다. 허 이사는 "예전에는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 처방전에 더해 소견서를 같이 가져가야 했는데, 매번 2만~3만원이 드는 소견서를 떼는 것도 비용부담이 컸기 때문에 간소화해달라는 목소리를 내왔다"며 뇌전증에 대한 이해도가 과거보다 향상되면서 현재 뇌전증 치료환경에 많은 개선이 이뤄지고 있다고 짚었다. 

하지만 환우와 부모가 느끼는 뇌전증 환우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은 아직도 심각하다. 허도경 이사는 "뇌전증 발작이 있을 때 위험한 물건만 치워주면 되는데, 언제할지 모를 뇌전증 발작을 한 번이라도 유치원이나 학교, 직장에서 하면 유치원도, 학교도, 직장도 다니기 어렵다"며 "뇌전증으로 장애등록이 돼 활동보조사를 쓰는 경우에도 발작을 일으키면 활동보조사가 그만둬 엄마가 24시간 케어해야 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밀려난 뇌전증 환우의 케어는 모두 가정에서 떠맡고 있는데, 환우는 외톨이가 되고 가족도 상당한 돌봄부담에 놓인다. 허 이사는 "아이들이 의무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인데, 우리 아이도 거주지인 부산에서 받아주는 고등학교가 없어 울산에 있는 일반고등학교의 장애인특수학급으로 다녀야 했다"며 "또 엄마들은 너무 아파도 아이들을 맡아줄 곳이 없어 병원조차 가지 못한다"고 짚었다. 

이런 까닭에 뇌전증 환우와 가족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를 제도적으로 빠르게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허도경 이사는 역설했다. 그녀는 "뇌전증을 앓는 아이도 아이지만, 그 아이를 돌보는 주양육자인 엄마를 위해서도 제도적 지원이 마련돼야 한다"며 "치매관리법처럼 뇌전증관리지원법을 제정해 지역 별 뇌전증 지원센터와 주간보호센터를 만들어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