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가발린, 암 환자 지속적인 통증 관리에 유용"
대한통증학회 이평복 회장, CIPN 관리 중요성 강조 '미로가발린' 급여 근거 마련 위해 다기관·다학제 연구 추진
'화학요법 유발 말초신경병증(Chemotherapy-induced peripheral neuropathy, 이하 CIPN)'은 암 환자들의 삶의 질과 치료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이상반응 중 하나로, 고령화 및 암 발생률 증가 추세와 맞물려 관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동안 CIPN 치료에는 '둘록세틴'과 같은 선택적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SNRI) 및 가바펜티노이드 계열 약제(프레가바린, 가바펜틴 등), 삼환계 항우울제(아미트리프틸린 등) 등이 사용돼 왔지만, 부작용으로 인한 장기 지속 치료의 한계, 임상적 근거 부족 등의 이유로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요구가 계속돼 왔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020년 1월 '미로가발린(상품명 탈리제)'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치료 옵션이 한정적이었던 해당 분야에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한 것.
이에 대한통증학회 이평복 회장(분당서울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을 만나 국내 CIPN 관리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새롭게 도입된 '미로가발린'의 임상적 가치와 역할에 대해 들었다.
- 암 환자에서 항암화학요법으로 인한 말초신경병증성 통증(CIPN)을 호소하는 비율은? 또 이들 환자에게 통증 관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CIPN은 항암제가 작동하면서 약물이 말초신경까지 함께 공격해 발생하는 통증을 일컫는다. 항암화학요법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은 치료 과정이 끝나면 대개 완화되지만, CIPN은 치료 과정뿐만 아니라 종료 후에도 발생하기 때문에 환자들이 견디기 힘들어 한다.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거나 '온 몸이 저리고 아파서 잠을 잘 수 없다'는 등 CIPN으로 인해 항암화학요법을 더 이상 받지 못하겠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이 상당수다.
통상 고형암 치료를 위해 항암화학요법을 시작한 후 약 60%의 환자가 한 달여 만에 치료를 중단하고 싶다고 호소하며, 약 40%의 환자는 모든 치료과정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통증을 느낀다. 고형암 치료에 사용되는 약 3~4가지 대표적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환자 중 약 40~70%가 CIPN을 경험한다는 연구도 있다. 경험적으로는 최소 20% 정도는 CIPN으로 암 치료를 포기하려 한다고 느낀다.
과거에는 암 치료의 목적이 오직 '생존'에만 있었다면, 이젠 환자의 치료 성과를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통증 관리가 암 치료 예후에도 영향을 주는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해당 항암제가 환자에게 통증을 유발시키는 메커니즘을 알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모든 항암제의 기전이 명확한 건 아니다. 따라서 치료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지면 CIPN도 완화될거라 생각하고 혈액순환제를 처방한다거나, 항암치료 과정에서 높아진 활성산소에 의한 작용으로 간주해 활성산소 억제제를 투여하기도 한다. 즉, CIPN 치료는 아직 많은 연구가 필요한 영역으로, 적절한 관리 전략을 찾기 위해 새로운 연구나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선택적 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SNRI) 계열인 '둘록세틴'만이 미국식품의약국(FDA)이 공인하고 미국임상종양학회(ASCO) 및 대한통증학회가 진료지침을 통해 CIPN 1차 치료제로서 권고하고 있는 유일한 약제다. 둘록세틴은 우울증 및 섬유근육통, 골관절염 통증, 당뇨병성 말초신경병증성 통증 치료와 더불어 CIPN에도 사용할 수 있는데, 기전적으로 세포막 사이의 흥분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점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기전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장기 복용 시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정도의 매스꺼움, 어지러움, 졸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프레가발린' 및 '가바펜틴' 등은 효과에 대한 임상적 근거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로 진료지침에서 권고되고 있진 않다. 때문에 실제 진료 환경에서는 환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치료제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며 약효에 따라 용량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CIPN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환자들에서 항암화학요법 종료 후에도 여전히 CIPN이 지속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둘록세틴은 부작용을 고려했을 때 장기간 지속적으로 끌고 가기엔 어려움이 있고, 프레가발린은 용량 조절은 용이하나 효과(efficacy) 면에서 명확한 근거가 제한적인 상황이다. 즉, CIPN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 항암치료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통증 완화 치료 옵션이 부족하다.
- 최근 국내에 '미로가발린'이라는 새로운 치료 옵션이 도입됐는데, 기존 치료제들과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과거 신경병증성 통증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는 나트륨 채널(sodium channel)을 통해 신경을 안정화시키는 '카바마제핀'이 주로 사용됐다. 이후, 후근 신경절(Dorsal Root Ganglion) 내 진통 효과에 관련된 '알파 2 델타(α2δ)'가 발견되고, 이것이 칼슘 채널 안에서 심장과 무관하게 기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α2δ' 리간드(ligand)만을 선택적으로 차단해 신경전달 기능을 억제시킬 수 있는 '가바펜티노이드' 계열 약제(프레가발린, 가바펜틴)들이 개발됐다.
'미로가발린' 역시 가바펜티노이드 계열이지만, 기전적으로 어지러움과 같은 부작용이 덜하다. 다이이찌산쿄 연구자들이 α2δ 내에서도 소단위체(subtype)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α2δ-1'은 뇌(spine, 진통 작용), 'α2δ-2'는 신경(cerebellum, 중추신경계 작용)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 중 미로가발린은 'α2δ-1' 리간드에 대한 높은 친화성과 느린 해리로 더욱 지속적인 진통 효과를 낸다. 반면, 중추신경계 부작용에 관련된 'α2δ-2'와는 친화성이 낮고 빠르게 해리돼 졸림, 어지러움과 같은 중추신경계 특이적인 약물이상반응(adverse drug reactions, ADRs)이 낮게 나타난다.
미로가발린은 이러한 이론적인 근거를 가지고 잠재력을 계속해서 확인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학계에서는 미로가발린이 둘록세틴의 부작용을 보완할 수 있는 치료 옵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새로운 치료 옵션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미로가발린은 국내에 출시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약이고 비급여 상태이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이 있어 환자 접근성은 매우 낮다.
- '미로가발린'의 이러한 이론적 잠재력이 임상시험 결과를 통해서도 입증된 것인지 궁금하다.
CIPN 치료 옵션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근 일본에서는 미로가발린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잇따라 보고돼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일본 내 두 개 센터에서 둘록세틴과 미로가발린의 병용요법에 대해 살펴본 연구였으며, 나머지 하나는 중증의 CIPN을 가진 환자에서 미로가발린을 평가한 전향적 연구(MiroCIP)였다.
특히 MiroCIP 연구에 따르면, CIPN 치료 효과가 없던 환자(중등도~중증 CIPN 환자)에서 미로가발린 12주 치료 시 통증 점수(numeric rating scale, NRS)가 유의하게 감소했으며, CIPN으로 인한 항암화학요법의 용량 감량 및 치료 중단률이 낮게 유지됐다. 미로가발린 치료 중 CIPN으로 인한 항암치료 중단율은 3.8%에 불과했다. 즉, 미로가발린을 사용해 지속적인 통증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기존의 CIPN 관련 연구들이 대부분 항암화학요법 치료 완료 후 신경병증성 통증이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MiroCIP 연구는 항암치료 중에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CIPN 관리를 통한 항암치료 중단율을 평가한 최초의 연구라는 것이다. 다학제적인 디자인이 반영된 굉장히 의미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둘록세틴의 경우 치료 중단율이 높기 때문에, 미로가발린 치료 환자에서 항암치료의 중단 또는 투약주기/용량 조절을 겪지 않았다는 점은 유의미한 개선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환자들의 삶의 질 점수도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 그렇다면 기존 치료제들은 항암치료 과정에서의 임상적 근거가 없었다는 것인지.
그렇다. 지금까지는 항암치료 후 통증이 지속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돼 왔다. 특히 CIPN이 더 많이 발생하는 약제들이 있다. '시스플라틴', '탁셀' 등과 같이 고형암에 주로 쓰이는 약제들인데, 이런 약제들을 대상으로 항암치료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 통증 관리에 대한 임상적 근거는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MiroCIP 연구가 더욱 의미 있다.
- MiroCIP 연구 결과가 '미로가발린' 급여화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전향적 임상연구로 임상적 유용성을 보였기 때문에,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국 환자들에게 보험급여가 적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만, 미로가발린이 아직 일본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만 시판되고 있어 미국이나 유럽 데이터가 제한적이다.
앞서 '프레가발린'은 전세계적으로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된 상태였고, 회사도 많은 투자를 했기에 급여권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로가발린 역시 급여를 위해서라면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많은 경험과 데이터를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통증학회는 현재 미로가발린에 대한 국내 다기관·다학제 연구를 계획 중에 있다.
국내 환자들이 미로가발린 치료 혜택 누리기 위해서는 급여화가 필요하고, 여기에는 근거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근거를 생성하는 것이 의료진과 학계의 역할이기 때문에, 대한통증학회가 주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아직 미로가발린에 대한 데이터가 제한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전세계적으로도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미로가발린' 급여화에 대한 학회의 역할이 커 보인다.
미로가발린을 포함해 '통증학'이라는 분야는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비급여 치료로 분류되고 있다. 필수의료로 가야 할 치료들도 비급여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암성 통증은 물론이고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과 같은 필수적인 통증 문제에 대해서도 학회가 참작하고 있고, 이에 대해 중요한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다. 미로가발린 연구도 이런 맥락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코리아헬스로그 자매지 청년의사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