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욱 희귀질환 톺아보기] 동전의 양면 같은 질환 '윌슨병'·'멘케스병'
분당차여성병원 임상유전체의학센터 유한욱 교수
구리(copper 카퍼)는 화학 원소로 기호는 Cu, 원자 번호는 29이다. 구리는 부드러운 금속으로 열과 전기의 전도성이 매우 높아 전기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주로 사용되며 그 외에도 건축 자재나 다양한 합금의 원료로 사용된다. 구리는 제조업 전반에 광범위하게 사용 됨으로 구리 가격이 실물 경기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학 분야에서는 닥터 카퍼(Dr. Copper)라고도 불린다.
이야기를 의학분야로 바꾸어 보면, 구리는 인체에 필수적인 미량 원소로, 다양하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구리는 18개 이상의 구리단백질(Cuproprotein)과 결합하여 효소 활동에 관여한다. 항산화작용, 면역작용, 헤모글로빈 생성, 탄수화물 대사, 카테콜라민 생합성, 콜라겐, 엘라스틴, 케라틴 등의 생성에 관여한다. 우리는 하루 2~6mg(작은 모래알 1개 크기 정도)의 구리를 음식으로 섭취하나 주로 소장에서 반 정도가 흡수되고 대부분 담즙을 통해 대변으로 배설된다. 소변으로도 미량 배출된다. 실제 인체에서 사용되는 양은 1mg 미만이다.
구리가 풍부한 식품들은 콩, 견과류, 해산물, 간 등의 내장, 달걀 노른자 등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특되어 체내에 축적됨으로 구리의 중독증상을 보이는 유전병과 반대로 장에서 흡수가 안되어 심한 구리의 결핍증상을 보이는 유전병이 있다. 전자가 '윌슨병'이고, 후자가 '멘케스병'이다. 이 두 질환은 동전의 양면과 같고 원인 유전자의 염기서열도 매우 유사하다.
정상적 배설이 안돼 구리 중독 증상 보이는 '윌슨병'
구리가 정상적으로 배설이 안돼 구리중독 증상을 보이는 윌슨병은 1912년 Samuel Alexander Kinnier Wilson이라는 영국의 신경과 의사가 간의 병변과 뇌의 심부(기저핵)에 변성이 동반된 환자를 부검을 통해 처음으로 보고했다. 이후 약 80년이 지난 1993년에 이 질환이 ATP7B라는 유전자의 결함으로 발생하는 것이 알려졌다. 발생빈도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약 1/30,000 빈도로 추산된다. 한국인에 비교적 흔한 유전질환의 하나다. 상염색체열성 유전질환이다. 즉, 보인자인 부부의 자녀 중 1/4이 환자가 된다. 한국인은 보인자 빈도가 1/50~1/80 이다. 간에서 담즙으로 구리를 배출시키는 기능과 ceruloplasmin이라는 단백질에 구리를 포합시키는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는 질환이다. 구리는 간, 뇌, 신장, 각막 등에 침착하게 된다.
소아기에 나타나는 가장 흔한 증상은 우연히 발견되는 간효소 수치의 증가다. 성인에서는 주로 신경 혹은 정신과적 증상이 첫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간증상은 다양한데 대부분 8세에서 20세 사이에 간효소 수치의 증가가 있어서 원인불명의 간염 등으로 오진되기도 한다. 만성 간질환 및 간경변증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급성 전격성 간염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신경증상은 파킨슨병에서 볼 수 있는 강직성과 발음장애, 떨림, 얼굴의 운동이상증 등이 대표적이며, 심한 감정의 기복, 인격의 변화 등 정신과적 증상도 흔하다. 신경증상은 서서히 진행하는 만성 간질환이 있는 경우에 진단이 늦어져서 더 흔히 동반된다. 눈의 증상은 ‘Kayser-Fleischer ring’이 대표적인데 각막의 가장자리에 생기는 갈색변화이다. 기타 증상으로는 급성 용혈성 빈혈, 미세 혈뇨, 아미노산뇨, 드물게는 관절염과 심근염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진단은 간 및 신경 증상과 눈의 Kayser-Fleischer ring의 존재, 낮은 ceruloplasmin 농도, 높은 소변 구리 배출량 등을 종합하여 내리게 된다. 생화학적 검사소견이 애매한 경우는 간조직의 구리 정량분석이나 ATP7B 유전자 분석이 진단에 도움이 된다. 이 질환은 신생아 선천성대사질환 스크리닝 검사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최근 일부 상업적 검사실에서 무분별하게, 신생아에서 몇가지 유전자형만 가지고 윌슨병보인자 검사를 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구리제한식이와 약물로 치료한다. 치료약물은 체내에서 구리배설을 촉진시키는 약물과 구리흡수를 억제하는 약물로 대별할 수 있다.
1956년에 페니실라민이 처음으로 치료에 도입됐고 소변으로의 구리 배출이 현저히 증가하는 효과가 있으나 발진, 열, 두드러기, 백혈구 감소증, 혈소판 감소증, 단백뇨, 홍반성 낭창, 재생불량성 빈혈, 심한 관절염, 신경증상의 악화 등, 다양한 부작용이 약 30%의 환자에서 동반된다. 신경증상이 심한 환자, 소아 및 증상이 없는 환자의 초기 치료법으로는 권장되지 않는다.
트리엔틴 또한 구리배설 촉진제로 부작용은 적으나 냉장보관해야 한다. 아연(Zinc)제제는 섭취된 구리와 결합되어 대변으로 배설시키는 구리흡수 억제제다. 속쓰림, 철결핍성 빈혈이외에 부작용이 거의 없는 안전한 약제이나 급성기의 치료에는 권장되지 않는다. 정신과적 증상과 신경 증상들은 치료에 잘 반응하지만, 만성 간질환의 진행으로 간기능 부전증이 있거나 급성 전격성 간염의 경우에는 간이식이 최후의 치료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간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도 윌슨병 환자였다. 조기에 진단하여 평생 잘 관리하면 예후가 무척 좋은 질환이다.
신생아 10만~20만명당 1명에서 발생하는 구리 결핍 '멘케스병'
반면에 멘케스병(Menkes disease)은 대부분의 환자가 예후가 매우 안 좋은 비극적인 질환이다. ‘꼬인 머리카락병(kinky hair disease)’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구리 운반의 장애로 인한 구리결핍으로 퇴행성신경병증이 생기는 성(X)염색체 열성유전 질환이다. 즉 모계를 통해 유전되며 이론적으로는 남자만 환자가 되나 드물게 여자도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가족력없이 산발적인 변이로 발생하기도 한다.
1962년에 멘케스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1972년에 이 질병이 구리대사의 장애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멘케스병은 ATP7A라는, 윌슨병 유전자인 ATP7B와 염기서열이 매우 흡사하나 기능은 완전히 달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질환을 일으킨다. 발생빈도는 다행히 윌슨병보다 훨씬 드물다. 정확한 빈도는 확실치 않으나 신생아 10만~20만명당 1명의 빈도로 발생한다.
임상증상은 전형적으로 생후 2~3개월 경에 발달 지연 및 퇴행, 몸통의 저긴장증, 영아 연축 등의 경련을 보인다. 조기양막파열로 조산하여 미숙아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머리카락과 눈썹이 특징적인데 짧고, 성글며, 꼬여있고 멜라닌색소가 부족하여 대개 밝은 갈색을 띤다. 머리카락이 가는 철사 같이 뻣뻣하고 잘 부스러진다. 피부가 부드럽고 늘어져서 마치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느낌이다. 혈관의 이상도 흔한데 동맥의 파열, 여러 혈관들의 동맥류와 혈전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선천적 골절과 변형, 골다공증, 오목가슴 등을 보일 수도 있다.
진단은 혈액내의 구리의 농도와 ceruloplamin 농도가 낮고 환자의 특징적인 증상으로 의심할 수 있으나 확진은 유전자 진단으로 한다. 뇌 MRI 혈관 조영술 소견에서는 백질의 변화와 꼬불꼬불하고 좁아진 혈관들을 관찰할 수 있다. 치료제로는 윌슨병치료와 반대로 구리를 투여하는 것인데, 생후 4주이내(가능하면 10일 이내)에 투여하면 신경학적 예후를 개선시킬 수 있다. 치료가 늦어지면 머리카락 색깔은 정상으로 변하나 신경학적 증상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다.
이러한 환자들은 침상에 누워있는 상태로 지내다가 대개 6~7세 이전에 폐렴 등으로 사망하는 비극적인 예후를 보인다. 현재 유전자치료제 개발과 효율적인 구리투여제제 개발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조기진단이 관건이다. 환자가 있는 가계에서 다음 임신에서는 착상 전 진단을 권고하기도 한다.
윌슨병은 다행히 치료제가 있으니 신생아시기에 스크리닝에 사용할 생물학적 표지자가 없고, 멘케스병은 조기에 진단할 방법과 효과적인 치료제도 없다. 이와 같이 95% 이상의 희귀질환들이 치료제가 없는 상황이다. 너무나 드물어서 약물을 개발해도 상업성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National Institute of Neurological Disorders and Stroke (NINDS)에서는 멘케스병 연구에도 많은 연구비를 할당하고 있다. 약물개발에 상업성이 없는(Market Failure) 질환이라도 국가 주도로 질환 하나하나를 콕 찍어 연구비를 집중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질환의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 일도 중요하다.
질환의 유병인구, 치료제 유무, 기대수명, 삶의 질 등을 고려해야 하지만 극희귀질환들에도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희귀질환의 종류는 너무 많고, 유전자형도 다양하고, 각 질환의 환자 수는 적은 것이 치료제 개발의 큰 걸림돌 중 하나이다. 따라서 치료전략으로는 다양한 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을 맞춤으로 쉽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 치료전략’이 중요하다.
유한욱 교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마운트 시나이병원 유태인 유전학센터에서 연수한 뒤 미국의학유전학전문의를 취득했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클리닉 소장을 거쳐 소아청소년병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한소아내분비학회장, 대한의학유전학회 이사장, 복지부 선천성기형 및 유전질환 유전체연구센터장, 진흥원 희귀난치병정복사업 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