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질환 신약, 항암 신약과 다른 허가·급여 트랙 필요하다
세브란스병원 고홍 교수, 희귀질환 특성 반영한 허가-급여제도를
유전자 돌연변이 유형에 따라 여러 아형으로 분류되는 진행성가족성간내답즙정체증(Progressive Familial Intrahepatic Cholestasis, PFIC) 같은 유전성희귀질환에 대한 신약 접근성 개선을 위해 현재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에서 전문의료진 참여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급여 평가 단계 이전의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 단계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보건복지부가 제시한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은 '혁신적 신약'에 대한 식약처 '허가'와 심평원 급여 평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약가 협상을 병행해 신약의 허가부터 보험 등재 기간을 줄여보자는 취지로 2023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 제도의 취지대로 빠른 허가와 급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약제와 질환의 특성에 맞춰 '항암 신약'과 '희귀질환 신약'에 대한 별개 트랙의 제도 운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고홍 교수는 지난 11일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과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가 공동 주최한 '소아 희귀질환 치료제 접근성 강화를 위한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암은 보통 표준치료법이 있고 신약 효과를 확인할 지표가 명확하지만, PFIC 같은 유전성희귀질환은 표준치료법도 없고 신약 효과를 확인할 지표도 불명확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희귀질환 신약'의 접근성 개선을 위해 신약 허가 단계부터 전문의료진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홍 교수가 희귀질환 신약에 대한 허가-급여-평가제도에 이같은 제언을 한 이유가 있다. 고 교수가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PFIC'은 국내 약 50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간질환이다. 이 소수 환자들은 유전자 변이에 따라 10여종의 아형으로 나뉜다. 또 이 병은 표준치료법도 없어서 환자에 맞춰 다양한 치료가 이뤄지는데, 어린 아이가 간손상이 심하거나 극심한 가려움증 때문에 간이식수술까지 하는, 빠른 치료환경 개선이 절실한 '치명적 질환'인 까닭이다.
진행성가족성간내답즙정체증에 대해 고홍 교수는 "진행성이라는 말은 점점 나빠진다는 얘기이고, 가족성은 가족 내에 유전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라며 "'간 내'는 간 안에 계속 문제가 된다는 것으로 끊임없는 간 손상을 유발하는 것을 뜻하고, '담즙정체증'은 담즙이 내려가지 않고 간에 축적돼 결국 간이식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질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며 생후 6개월 아기의 간이 이 병으로 간이식이 필요할 정도로 망가진 사례를 들었다(사진).
국내 의료현실에서 제대로 된 PFIC치료법이라고 할만한 치료도 현재 없다. 고홍 교수는 "사실 PFIC은 치료법이 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상황"이라며 "약국에서 흔히 사서 복용할 수 있는 우루사를 PFIC 아기들이 먹는다. 그런데 우르사는 치료약이 아니라 증상 완화 혹은 간 손상을 좀 더디게 해주는 정도밖에 효과가 없다"고 짚었다. PFIC은 간이식수술 외에 담즙이 간을 통과하지 않고 다른 길을 통해 몸에서 빠져나가게 하는 수술도 하지만, 이것도 완치법은 아니다.
고 교수는 "이런 수술은 수술 리스크가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수술이 완치법이 될 수 없다"며 "결국 이런저런 약을 쓰다가 안 되면 결국 간이식을 하게 된다. 간이식을 못하면 사망한다. 생후 6개월짜리 아기 간이 이 정도(사진)로 망가졌으니 간이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PFIC의 치료현실을 짚었다. 이런 까닭에 지난해 8월 국내 허가된 고가 PFIC 신약인 '오데빅시바트(제품명 빌베이)'의 빠른 급여가 절실한 상황이다.
회장담즙산수송체억제제 '오데빅시바트'는 간으로부터 나온 담즙이 장에서 재흡수되는 것을 막아 간손상을 막고, 혈청 담즙산을 줄여서 가려움증(소양증) 개선에도 효과가 있다. 이런 까닭에 이 약의 두 가지 효과 지표는 '소양증 개선'과 '혈청 담즙산 감소'으로 잡혀 있는데, 혈청 담즙산 감소는 혈액검사로 객관적 확인이 가능하다고 해도 말 못하는 아이에게 '소양증 개선'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는 어려움도 존재한다.
고홍 교수는 "아이가 소양증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고 밥을 먹을 수도 없고, 잘 크는 건 더 말할 것도 없다"며 이런 까닭에 PFIC에서 소양증 개선이 중요한 치료 지표인데, 항암 신약처럼 생존율을 따지는 것과 평가 구조가 다르다는 점을 짚었다. 또 다른 문제는 희귀질환 신약의 허가 범위가 전문의료진 참여 없이 이뤄졌을 때, 너무 좁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오데빅시바트 연구의 최종 목표가 소양증 개선이어서 국내에서는 소양증이 있는 환아만 쓸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오데빅시바트는 간에 담즙이 정체되는 것을 막아 간손상을 막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소양증 여부와 상관 없이 PFIC 환자에게 쓸 수 있는 상황인데 우리나라는 전문의료진 참여가 급여 단계에서 이뤄지면서 이런 점이 신약 허가 단계에서 반영되지 못했다. 또 고 교수는 "희귀질환은 유전자 돌연변이 위치나 모양에 따라 같은 질병이어도 증상이 약간씩 다르고, 약물 반응이 약간씩 달라서 한 가지 지표를 가지고 따지고 나가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도 짚었다.
고홍 교수는 "오데빅시바트를 썼을 때 효과가 항암 신약처럼 암이 줄었나, 안 줄었나 이렇게 보는 단순 비교하고는 좀 달리 지표들이 여러 개일 수 있다"며 이런 까닭에 미국, 유럽에서는 PFIC을 비롯해 다른 유전성희귀질환 신약의 허가, 급여 범위를 넓게 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 교수는 "이 중 하나만 들어도 환자는 증상이 개선되고 호전될 수 있어서 허가, 급여 범위를 넓고, 애매하게 잡는다"며 "환자에게 도움되는 방향으로 결정하자는 뜻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고홍 교수는 "희귀질환 신약 허가를 논의할 때부터 전문의료진이 참여해 희귀질환을 치료할 때 이 약에 대한 방향성을 어떻게 잡자라고 처음부터 사전 협의를 하는 것이 정부가 허가-평가-협상 병행 시범사업 제도를 만든 취지에 맞다"며 그래야 희귀질환 신약과 대상 희귀질환의 특성에 맞춰서 제대로 된 방향성으로 속도감 있게 '혁신신약의 빠른 허가-급여'라는 목표로 달려갈 수 있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