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있는데 약을 쓸 수가 없다"…시신경척수염 환자 가족의 절규
[페이션트스토리] 시신경척수염 환자 보호자 박응규씨 불합리한 급여 기준 세상에 알리려 국민동의청원 제기 “두 번 재발이면 장애…장애 생기고 약 쓰는 게 무슨 의미”
“내 딸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발병한 다른 아이들만큼은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20여 년간 딸 박보람 씨를 돌봐온 아버지 박응규 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보람 씨의 병은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시야가 캄캄해지며 시작됐다. 하지만 다발성경화증으로 잘못 진단되어 수년간 엉뚱한 치료를 받았고, 그 사이 시신경과 척수가 손상돼 결국 휠체어에 의지하는 삶이 되었다. 뒤늦게 국립암센터 신경과 김호진 교수를 만나 희귀질환인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NMOSD, Neuromyelitis Optica Spectrum Disorder) 으로 확진을 받았지만, 이미 수십 차례 재발을 겪은 뒤였다.
치료제가 없어 20년 동안은 대증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부터 항암제인 리툭시맙을 투여하며 일부 호전이 있었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하루 5~7시간 걸리는 투여 시간은 물론, 부작용·감염·쇼크까지 환자와 가족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겼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치료제가 있긴 하지만, ‘1년에 두 차례 재발’ 후에야 쓸 수 있다. 그러나 NMOSD 환자에게 재발 두 번은 곧 치명적 손상과 직결된다. 고통스러운 재발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겪은 뒤에야 약값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은 환자들에게 가혹하다.
최근에는 재발률을 ‘0%’까지 낮춘 신약이 허가됐지만, 문제는 보험 적용이다. 눈앞에 약이 있어도 고가 때문에 쓸 수 없으니, 환자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박응규 씨는 딸이 재발의 두려움 없이 평생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러나 이 가족에게 돌아온 것은 희망이 아닌 또 다른 시련이었다. 20년간 딸의 눈이자 다리가 되어준 아내가 간병의 무게에 지쳐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 70세가 넘은 박응규 씨는 가족을 지탱하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며 홀로 딸과 아내의 돌봄을 감당하고 있다.
보람 씨는 저녁 식사 후 아버지에게 강아지 산책을 권한다. 잠시라도 아버지가 간병에서 벗어나 숨 돌리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설거지를 끝낸 뒤 환한 미소로 아버지를 맞는다. 그 모습이 고맙지만, 동시에 안쓰럽기도 하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코리아헬스로그와 만난 박응규 씨는 “아이의 웃음은 무너진 일상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힘이자, 오늘도 살아내게 하는 이유”라며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달 21일 ‘NMOSD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신속히 신약을 급여하고, 환자에게 치료제 선택권을 보장해 달라’는 국민동의청원을 제기했다. 환자가 진단 직후부터 효과적인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급여 기준을 완화해 달라는 것이다.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정부와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은 게 무엇이었는지 박응규씨를 만나 들었다.
- 환자에게 첫 증상이 나타났을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 부탁드린다.
첫 증상은 16살, 학교에서 책상에 앉아 있던 중 갑자기 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눈이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근처 안과를 찾았고, 이후 큰 대학병원 두 곳을 방문했지만 다발성경화증으로 오진됐다. 희귀질환이다 보니 알려진 정보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약 5년은 다발성경화증 치료를 받았다. 당시에는 시신경척수염 범주질환( NMOSD)이라는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한 채 잘못된 약물 치료를 이어갔다. 여러 차례 재발을 반복한 끝에 현재는 시신경과 척수에 장애가 남아 휠체어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 어떤 과정을 거쳐 NMOSD로 최종 진단됐나.
두 달에 한 번꼴로 재발이 있었고, 결국 6년 동안 무려 40차례의 재발을 겪었다. 그러다가 20대 초반에 환우회에서 개최한 세미나에서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던 김호진 교수님을 만나 비로소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 NMOSD 진단 이후에는 어떤 치료를 받았나.
진단 당시에는 NMOSD에 대한 치료제가 없어 대증치료 밖에 시행할 수 없었다. 리툭시맙 치료를 시작하면서 증상에 일부 호전이 있었지만, 해당 치료는 상태 악화를 막아주는 수준이다. 또한 10개월 주기로 투약이 필요한데 보통 한 번에 5~7시간 동안 투여를 하니 환자들의 신체적, 정신적으로 겪는 부담이 크다.
- 환자의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
이전에는 주로 휠체어를 타더라도 보조 보행기를 잡고 혼자 일어서거나 몇 걸음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보조 보행기를 잡고 일어나지도 못한다.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체중도 점차 줄고, 움직이지 못하면서 욕창까지 생겼다. 면역억제제 치료로 면역이 저하되어 감기, 폐렴, 장염에 자주 시달리고, 때로는 쇼크로 응급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에도 약물 이상반응으로 기관지가 붓고 호흡 곤란을 겪었다. 이러한 치료 과정을 함께하며, 내 딸에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 가족들도 많이 힘들 것 같다. 아버님의 연세도 적지 않으신 것 같은데 가족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아내는 3년 전 오랜 간병 생활의 피로로 인해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때부터 아내를 직접 돌보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딸은 평일에는 활동보조사의 도움을 받지만,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보조사가 없어 모든 집안일이 내 몫이다. 올해 내 나이가 70살이다. 아침부터 요리와 청소를 마친 뒤 딸을 씻기고 직접 운전해 재활센터에 데려다 주고, 아내도 병원에 데려가 재활치료를 받도록 한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체중이 10kg이나 빠졌다.
- 국민 청원을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계기는 무엇인가.
20년 넘게 딸을 간병하다 아내마저 쓰러진 이후, 웃음과 희망을 잃고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치료제가 있음에도 현실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고, 더 이상 우리처럼 무너지는 가정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국민청원을 올리게 됐다. 일본의 경우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곧바로 신약 투약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두 차례 재발을 겪어야만 건강보험이 적용된다. 그러나 NMOSD 환자들의 경우 두 번의 재발을 겪는 순간 이미 시신경이나 척수 손상으로 장애를 입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발로 인해 장애가 발생한 후에 약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 청원을 통해 정책 입안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절망과 싸우고 있다. 정부와 사회가 환자의 현실을 직접 보고 느낀다면 더 이상 이들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계시는 분들에게 서류만으로 환자들의 현실을 판단하지 말고, 실제로 가정 방문 등을 통해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부디 환자들이 다시 가정과 사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주길 바란다.
- 청원 이후의 계획은 무엇인가.
이번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청와대에 직접 민원을 넣을 생각이다. 이재명 대통령께서 이번 청원을 꼭 들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 딸은 이미 수차례 재발을 겪으며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 막 발병한 어린 환자들은 아직 기회가 있다. 단 한 번의 재발로도 시력이나 운동 능력을 잃을 수 있는 이 병에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심지어 임상에서 재발률 0%를 보여준 치료제도 허가가 되었지만,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눈앞에 두고도 사용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부디 더 늦기 전에, 환자들이 이 치료제를 통해 재발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