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진물 그리고 눈물로 범벅' 된 결절성 양진 환자들의 삶
결절성 양진 환자, 진단방랑에 치료비 부담까지 이중고 "치료제 급여, 산정특례 등 제도적 지원 뒷받침 필요해"
"온몸이 가려워 피가 철철 날 정도로 긁어야만 잠시 진정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가 피와 진물로 범벅이 돼 있었습니다. 그게 제 일상이었습니다."
26세 김수진(가명) 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스민 절망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결절성 양진(Prurigo Nodularis, PN),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한 이 질환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어린 시절 피부 질환은커녕 여드름조차 크게 없었던 그는 20살 무렵, 처음으로 이유 없는 극심한 가려움과 피부 곳곳에 솟아오르는 결절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진단을 받기까지는 긴 '진단 방랑'을 겪어야 했다.
진단까지의 '방랑'…살을 뜯어내는 고통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김 씨는 동네 피부과를 찾았다. 단순 피부염쯤으로 여겨져 항진균제와 스테로이드 연고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오히려 증상은 점점 심해져 손가락 마디마다 결절이 솟아 일상적으로 손을 사용하는 것조차 불편해졌다.
이후 1년 동안 여러 피부과를 전전했지만 "믿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는 그는 결국 대학병원을 찾았다. 그때서야 아토피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단은 여전히 '정답'이 아니었다. 증상이 나타난지 수년 뒤에서야 주치의로부터 '결절성 양진'이라는 정확한 병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 단순 피부염이라고만 했어요. 그 사이 제 삶은 무너졌습니다. 피부를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긴팔만 입고, 밤마다 살을 뜯어내며 울었습니다."
삶을 되찾아준 생물학적제제, 그러나…
김 씨의 치료 과정은 실험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스테로이드 연고와 경구 스테로이드, 광선치료, 면역억제제까지…. 하지만 증상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 JAK 억제제를 2년간 복용하며 잠시 호전을 경험했지만, 안타깝게도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JAK 억제제를 먹던 한 달 동안 코로나19에 두 번, 독감까지 걸렸습니다. 남들은 가볍게 지나갔다는데, 저는 당시 숨쉬기도 힘들었어요. 회사에서도 '한 달에 세 번이나 연달아 감염됐다'는 걸 믿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이후 선택한 건 생물학적제제, '듀피젠트(성분명 두필루맙)'였다. 표적치료제 특성상 전신 면역 억제 부작용이 적어, 우려했던 몸 상태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식단을 자유롭게 하고 피로감도 줄어들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그는 듀피젠트가 '삶의 질'을 되찾아준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다. 바로 비용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치료비와 반복되는 치료 중단
듀피젠트는 결절성 양진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약제다. 김 씨는 1년여 투여했지만, 한 달 치료비가 월세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의료진과 투여 간격을 조정해봤지만, 지속적 사용은 불가능했다. 결국 제약사가 환자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또 다른 생물학적제제로 전환했지만, 이마저도 비용 문제로 6개월 만에 끊을 수밖에 없었다.
"27살 사회초년생이 수백만 원을 치료비로 쓴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결절이 올라오고, 그러면 또 삶이 무너집니다."
현재 그는 증상이 다시 악화돼 치료 재개를 고민 중이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이라는 장벽은 여전히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
결절성 양진 환자가 겪는 고통은 단순한 피부 질환의 차원을 넘어선다. 김 씨는 "가려움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오는 극심한 가려움은 단순히 '긁는다'는 수준으로 해소되지 않아, 살이 패이고 피가 고일 정도로 결절을 '뜯어내야'만 진정된다고 했다.
"잠결에 온몸을 묶고 잤는데도 아침에 보면 침대가 피와 진물로 흥건했습니다. 여름에도 긴팔만 입어야 했고, 샤워조차 고통이었습니다."
심리적 후유증도 깊다. 자존감은 무너지고, 대인 관계를 피하게 됐다.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병 앞에서 그는 정신과 진료까지 받아야 했다.
"사람들은 '긁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쉽게 말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말할 데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만의 전쟁 같았습니다."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절망하는 환자들
결절성 양진은 아직 국내에서 치료 패러다임이 정립되지 않은 질환이다. 진단에서부터 아토피나 다른 피부질환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아, 환자가 적절한 치료 기회를 놓치기 십상이다.
실제로 일부 의료진은 결절성 양진 환자에게 아토피 코드로 진료를 진행하기도 한다. 물론 두 질환이 동반된 경우도 적지 않지만, 아토피의 경우 급여가 적용되는 치료 옵션이 상대적으로 많고, 중증도에 따라 일부 환자들은 산정특례 혜택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료 행태는 결절성 양진 환자의 실제 현황을 왜곡시키고, 질환 자체에 대한 인식과 치료 환경 정립을 늦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결국 환자는 진단과 치료에 '이중고'를 겪게 된다.
인터뷰 말미, 그는 기자에게 호소했다.
"결절성 양진 치료제에도 건강보험, 산정특례 같은 제도적 지원이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합니다. 그래야 환자들이 치료를 중단하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결절성 양진은 완치가 아닌 '평생 관리'의 영역에 속한다. 환자에게는 단순히 피부 위의 결절이 아니라 몸과 마음, 사회적 관계와 경제까지 갉아먹는 고통의 이름이다.
한 젊은 환자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은 환자 개인의 목소리가 아닌,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수많은 환자들의 절규다.
<코리아헬스로그 자매지 청년의사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