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혈우병 치료, 출혈 관리에서 삶의 질 중심으로”

혈우병연구회, 환자 데이터로 급여 기준 개선·치료 표준화 앞장 KBDR 기반 맞춤형 치료, 국내 혈우병 진료의 새 전환점 최은진 회장 “데이터 기반 맞춤 치료와 다학제 협력이 새로운 과제”

2025-11-06     유지영 기자

“혈우병 환자의 평균 수명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30세를 넘기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치료 환경이 점차 개선되면서 혈우병 환자의 기대수명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제 혈우병 치료의 목표는 단순히 출혈을 막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제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바라보는 통합적 치료가 진정한 시작점이 되고 있다.”

대한혈액학회 산하 혈우병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은진 교수는 코리아헬스로그와의 인터뷰에서 치료 환경 개선을 넘어 환자 삶의 질을 중시하는 혈우병 치료 목표의 변화를 강조했다.

최은진 교수는 “혈우병은 더 이상 희귀질환이라는 이유로 단절된 진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며 “소아청소년과, 내과, 재활의학과 등 다양한 분야가 함께 협력할 때 비로소 진정한 통합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혈우병연구회는 국내 혈우병 진료 표준화와 치료 환경 개선을 위해 설립된 학술 단체다. 소아혈액종양학회 산하 선천성 응고장애위원회가 출발점이다. 소아혈액종양과 교수들이 중심이었지만 혈우병 성인 환자 진료의 필요성이 커지며 내과, 진단검사의학과, 정형외과 등 다양한 진료과가 참여하면서 지금의 혈우병연구회로 발전했다.

혈우병연구회는 환자 맞춤형 치료 체계 확립과 데이터 기반 연구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다. 환자 진료 매뉴얼을 개발하고 환자 등록사업(Korean bleeding disorder registry, 이하 KBDR)을 통해 국내 혈우병 환자 2,664명의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를 기반으로 급여기준 개선과 개인 맞춤형 치료 체계 구축 등 실질적인 제도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에 혈우병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최은진 교수를 만나 연구회의 역할과 향후 목표와 과제를 들었다.

대한혈액학회 산하 혈우병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대구가톨릭대병원 소아청소년과 최은진 교수는 코리아헬스로그와의 인터뷰에서 치료 환경 개선을 넘어 환자 삶의 질을 중시하는 혈우병 치료 목표의 변화를 강조했다.

- 과거에 비해 혈우병 치료 환경이 좋아졌다. 따라서 치료 패러다임도 바뀌고 그에 따라 연구회의 관심사나 연구 방향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과거에는 혈우병 치료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지원 체계 자체가 미흡했고 약제 공급 또한 원활하지 않았다. 국가가 혜택을 제공하는 만큼 제재도 많아서 의료진이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판단해 충분히 제공하기 어려움이 있었다. 이로 인해 현장에서 개인 맞춤형 진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제도적 장벽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상당 부분 개선됐다. 덕분에 의료진이 환자의 생활 패턴과 활동 수준을 고려해 치료 방침을 세울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제도적 개선을 넘어, 혈우병 환자의 삶의 질까지 주요 논의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치료 환경이 점차 개선되면서 혈우병 환자의 평균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당뇨병과 같은 성인병 관리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혈우병연구회에서는 만성질환과 관련한 문제 역시 주요하게 관심을 두고 다루고 있다.

혈우병 환자의 80% 이상이 겪는 관절 출혈 역시 혈우병연구회의 주요한 관심사로, 이를 관리하기 위한 예방요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관절 출혈과 같은 주요 증상뿐 아니라, 혈우병 환자에게서 동반될 수 있는 질환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관상동맥질환을 함께 가진 혈우병 환자는 스텐트 시술 후 출혈 위험 때문에 아스피린이나 항혈소판제를 쉽게 사용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면 투여해야 하는 혈액응고인자의 양도 매우 많아진다. 때문에 혈우병 환자에서 동반질환 관리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최근에는 유전자 치료제의 등장으로 연구 초점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혈우병연구회는 출혈 관리뿐 아니라 삶의 질 전반, 나아가 성인 환자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성인 질환까지 포괄적으로 논의하며 치료 방향을 모색하고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 국내 혈우병 환자 등록사업(KBDR)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환자 등록사업1차 연구는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다. 초기에는 환자 등록을 중심으로, 사용 약제와 투여 이력, 출혈 발생 양상 등을 파악하는데 초점을 뒀다. 2차 연구에서는 관절 상태 평가와 추적, 동반 질환 여부까지 포함해 살펴보고 있다. 더 나아가 삶의 질(Quality of Life) 설문조사, 심리•사회적 지원 필요성, 직업 여부 등 사회적 측면으로까지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 KBDR에 축적된 데이터는 어떻게 활용이 되나.

국내에서는 급여 제약으로 인해 환자 특성에 맞춘 맞춤형 치료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혈우병연구회는 KBDR 연구에서 축적된 실제 사용량, 출혈 빈도, 삶의 질 관련 데이터를 근거로 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꾸준히 제시하고 있다. 2023년 8월 A형 혈우병 혈액응고인자 제제의 건강보험 급여 기준 확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간 축적해온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데이터는 단순히 약제 비용을 넘어 환자의 일상과 사회적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며, 제한적인 급여 환경을 보다 유연하게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를 뒷받침하는 핵심 근거가 되고 있다.

KBDR 연구 데이터는 해외학회나 심포지엄 등에서 발표되며 데이터의 잠재력을 입증했다. 아직 공식 논문으로 보고된 사례는 없지만, 기존 데이터를 활용한 후향적 분석뿐 아니라 앞으로 축적될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전향적 분석을 통해 예측 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도 크다.

- KBDR 2차 연구에서는 관절 상태를 평가하고 동반 질환 여부까지 포함해 살펴보고 있다고 했는데 관절 상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평가하며, 진행에 있어 어려움은 없나.

KBDR 2차 연구에서는 환자들의 관절 상태를 추적·평가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검사를 시행하는데 여러 한계가 존재한다. 단순 엑스레이 기반 평가는 이미 손상된 상태만 확인할 수 있어 조기 발견에 한계가 있다. 이에 추가적인 초음파 검사나 MRI 검사가 필요하지만, 모든 환자에게 검사를 실시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

혈우병 환자들은 검사 비용 부담으로 인해 골다공증 검사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혈우병성 관절병증(hemophilic arthropathy)은 이미 질병 코드가 부여되어 있어 관련 검사와 치료에 급여 적용이 가능하다. 다만 골다공증은 아직 연관 질환으로 인정받지 못해 혈우병연구회가 별도의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향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 유관 기관에 근거를 제시하고, 환자들이 동반질환까지 부담 없이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재활의학과와의 협진이 확대되고, 현장에서 초음파를 활용하는 의료진이 늘어나면서 골다공증 검사에 대한 접근성이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다. 환자와 보호자들도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검사를 요청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 혈우병연구회 차원에서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적·의학적 과제가 있다면 무엇이 있나.

약동학(PK)을 고려한 개인 맞춤형 치료와 환자 교육의 보완이 필요하다. 혈액응고인자 제제를 투여할 때 핵심은 투여 직후 피크(peak) 농도가 충분히 상승하는지, 그리고 다음 투여 직전까지 혈액응고인자 최저치(trough level)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다. 그러나 해당 수치들은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환자는 피크가 크게 오르지 않거나 회복률(recovery)에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환자 개개인의 약동학적 상황에 맞춰 치료제를 처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

또한 치료를 받는 혈우병 환자의 생활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스포츠 활동을 즐기는 환자는 운동 시 평소보다 많은 혈액응고인자를 투여해야 할 수 있고, 직장인은 생활 패턴에 맞춰 주중에 집중 투여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나 세미나 등이 중단되면서 환자가 자신의 약동학을 이해하고 관리할 기회가 줄었다. 혈우병 환자가 스스로 생활 방식에 맞는 투여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교육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

- 마지막으로, 국내 혈우병 치료 환경 개선을 위해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린다.

혈우병 환자가 겪는 문제는 한 진료과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 특성을 지닌다. 따라서 다학제 협력 체계의 필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에 관련 진료과가 혈우병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바탕으로 협진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협력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는 환경 조성도 필요하다.

또한 환자가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을 수 있는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특히 혈우병 관리에서 중요한 과제는 환자 스스로 인지하기 어려운 무증상 출혈(subclinical bleeding)이다. 이러한 출혈은 환자와 의료진 모두 증상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정기적인 검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발견이 쉽지 않다. 치료와 관리를 꾸준히 이어가더라도 수년이 지나 발견되는 관절 손상 사례도 있다. 따라서 무증상 출혈을 조기에 발견하고, 환자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체계적 관리 시스템 조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의료기관에서 체계적인 협력이 원활히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이에 연구회는 협력 체계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환자가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표준화된 가이드라인과 매뉴얼 마련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 새로운 혈우병 치료제들이 빠르게 도입되고 있는 만큼, 이를 반영한 체계적이고 실효성 있는 매뉴얼 구축이 조속히 이루어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