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신종양학회 김태석 회장, “암 환자 ‘삶의 질’ 향상 기여”
“암, ‘생존’ 넘어 ‘삶의 질’ 높일 수 있는 방법론 찾는 시대 도래”
미국선 의미 중심·품위 치료도…삶의 양보다 ‘삶의 질’ 더 중요
암 진단 뒤 환자의 몸은 온갖 검사로 들여다보면서 왜 암 환자의 마음은 보려고 하지 않을까. 1970년 말 미국에서 태동한 ‘정신종양학’은 이 의문에서 시작됐다. 인간에게 생긴 병에 집중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인간’을 놓치고 있다는 깨달음이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게 한 것이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존재다. 때문에 암 환자가 된 순간 느끼는 심리적 충격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암 환자가 됐다는 현실에 신체적·사회적·정신적·문화적·영적으로 제각각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암 진단 뒤 쉬이 찾아오는 우울, 불안, 불면의 층위도 암 환자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암 진단이 됐으니 우울, 불안, 불면이 당연지사라고 생각한다. 정신종양학은 그 생각에 브레이크를 건다. 강도가 심하면 암 환자의 우울, 불안, 불면도 더는 당연하지 않고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암 환자에게 정신종양학적 치료적 접근이 필요한 때는 언제일까. 한국정신종양학회 김태석 회장(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을 만나 짚어봤다.
정신종양학적 서비스 경험 뒤, 입소문 통해 진료 환자 2배 늘어
- 정신종양학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하다. 정신종양학이 무엇인지, 국내 정신종양학적 의료서비스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신종양학은 암 환자·가족, 암 전문 의료진의 정신사회적 측면을 들여다보는 학문이다. 암 환자가 80% 정도로 핵심이지만, 암 환자의 가족과 암 치료를 맡고 있는 의료진도 정신적 소진이 심각하기 때문에 같이 봐야 한다. 암 환자의 메디컬 측면은 종양을 다루는 혈액종양내과 등 여러 임상과 의사들이 케어하기 때문에, 그 이면을 보자는 것이 정신종양학의 출발이었다.
과거 암은 불치병이었기 때문에 환자의 심리에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명제 앞에 인간의 마음은 설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수술기법과 항암치료 기법이 발달하면서 전투를 치르고 온 군인의 트라우마를 다루듯 암 환자의 정신사회적 측면의 케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싹텄다.
1970년 말 미국의 정신과 의사 지미 홀랜드 박사가 백혈병을 전문으로 보는 혈액종양내과 의사인 남편과 항암치료에 대한 견해를 나누다가 항암치료 과정에서 ‘왜 사람은 보지 않지’라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 정신종양학의 시발이 됐다. 지미 홀랜드 박사가 1980년 뉴욕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에서 정신종양 케어를 시작하면서 이 학문이 뿌리를 내렸다.
국내에는 국립암센터, 원자력병원 같이 암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원들이 생기면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이에 정신종양학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2005년 정신종양학연구회가 만들어졌고, 2014년 한국정신종양학회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국내엔 대형병원마다 암센터들이 만들어지면서 암센터 내 정신종양의학 서비스를 담당할 의사들에 대한 요구가 생겼고 실제 진료를 보는 병원들도 있다.
- 국내에서 정신종양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암 환자가 있다면 어떤 암종의 암 환자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전 세계적으로 유방암 환자가 정신종양 서비스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정신종양학 연구의 약 70%가 유방암 환자 대상이다. 유방암 환자는 수술 뒤 여성으로서 큰 상실감을 느낀다. 또한 유방암은 치료 성적도 아주 좋은 암이다. 1기 유방암 같은 경우 거의 98~99% 완치한다. 그럼에도 아직 암에 대한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유방암 전문 의료진들은 수술치료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유방암 환자의 심리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정신종양학에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환자를 보낸다.
서울성모병원에서는 2010년 경부터 유방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환자의 치료 과정에 정신종양학 전문의를 만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어놨다. 수술하고 난 뒤 첫 번째 외래 진료 전후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료를 보게 한 것이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진 뒤 처음에는 10명 중 3~4명의 환자가 왔다면 요즘은 유방암 자조모임을 통해 입소문이 돌면서 70~80%까지 오고 있다. 또 이렇게 문을 열어놓으니 유방암 환자들이 가장 많이 진료를 본다.
- 암 환자가 심리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을 때는 진단받을 때일 것 같다. 또 추가 검사를 통해 전이가 됐다거나 완치 뒤 재발했다거나 할 때 등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 할 것 같다. 보통 암 환자들은 어떤 때 어떤 양상의 심리적 증상을 겪는가?
암 진단 시 심리적 증상은 불안이 핵심이다. 암으로 인해 계획한 삶이 갑자기 불확실한 상황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암 진단 초반에는 수술·항암 치료 등이 이뤄지면서 긴장도가 확 올라가 불면증이 잘 온다. 암 환자에게 나타나는 이런 조짐을 암 진단을 받았으니까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사람마다 강도가 너무 다르다. 생각이 많아져서 잠깐 못 자는 사람도 있지만, 꼬박 밤을 새는 사람도 많다.
또 암 진단 뒤 휘몰아치듯 수술치료와 1차 항암치료를 끝낸 암 환자들에게 ‘현타’가 오는 경우가 많다. 암 전문의들은 임상의로서의 판단도 있지만 환자들 마음속에 변수가 많으면 치료적으로 좀 복잡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암 진단 뒤 몰아치듯 치료를 하는데, 치료가 끝난 뒤 환자들은 ‘암 환자로서’ 현실에 직면하고 우울해 할 수 있다. 전이 암으로 수술조차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암 환자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이런 불안, 불면, 우울, 두려움의 강도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디스트레스 온도계로 체크를…"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 그렇다면 어떤 경우 암 환자들에게 정신종양학적 치료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보나? 또 국내에서 치료가 필요한 환자 중 얼마나 치료를 받고 있나?
암 환자가 쉽게 치료적 개입이 필요할 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표가 있는데, 일주일간의 스트레스 강도를 0에서 10점 척도로 볼 때 4점 이상인 경우다. 0은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상태이고, 10점은 아주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다. 이 척도는 미국 국립종합암네트워크(NCCN)에서 개발한 것으로, ‘디스트레스 온도계’로 명명된다.
스트레스가 4점 이상이면 의미 있는 수준이다. 여기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찾아가기를 권한다. 국내에서 디스트레스 온도계 4점 이상의 암 환자는 전체 환자의 3분의 1쯤 된다. 그 중 실제 진료를 받는 암 환자는 5% 정도 밖에 안 된다. 힘들면 힘들다고 얘기하고 해결할 수 있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집 근처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가도 되고, 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일 때는 주치의에게 말하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의뢰를 내줄 것이다.
- 정신종양 의료서비스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실제 국내에서 가능한 것은 어떤 서비스들인가?
정신종양 범위는 광범위하다. 암 진단부터 호스피스까지 전체를 포괄한다. 약물치료가 기본이고, 심리치료를 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암 환자를 전문으로 보는 국립암센터가 가장 잘 되어 있는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심리학자, 간호사 역할이 생기면서 다른 병원들보다 활발히 케어가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의 서울 대형병원의 암센터는 서울성모병원 암병원 수준으로 운영되는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1명이 센터 내에서 정신종양 전문 진료를 보는 것이다. 주로 상담과 약물치료를 한다.
정신종양이 시작된 미국에서는 지역사회의 명상센터, 요가센터 등과 연계시켜주는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하고 있다. 또 2000년대부터 유명한 정신종양학 석학들이 나와 말기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미국에서 좀 특화된 정신종양학적 치료를 하는데, 의미 중심 치료, 품위 치료 등이 그것이다.
의미 중심 치료는 죽음에 직면한 환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유지하게 하는 치료기법으로, 이 치료를 통해 삶의 질을 높여주고 절망감을 줄여줄 수 있다. 품위 치료는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일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호스피스병원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이 정도의 수준의 진료까지 이뤄지기는 힘든 여건으로 안다.
- 정신종양학적 의료서비스가 암 치료 성적에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실제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입증됐나?
정신종양학적 의료서비스가 암 재발을 예방하고, 암 생존율을 높이느냐에 대한 여러 연구가 진행됐지만, 결과는 ‘그렇다’로 나온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다’로 나온 경우도 있다. 이 명제는 현재까지는 설왕설래 상황이다. 심증은 있지만, 이 서비스가 암 재발을 예방하고 암 생존율을 높여준다고 말하기는 현재 어렵다.
하지만 모든 연구에서 일관적으로 나온 결과가 있는데, 암 환자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삶의 양은 모르지만, 삶의 질은 올려준다.
- 마지막으로 암 환자와 가족에게 정신종양학회 회장으로 조언을 한다면?
정신종양학의 목표는 암 환자들의 삶의 질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의료진이 능동적으로 정신종양학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암 환자가 암 전문의에게 호소하면 전문적 서비스로 연계될 수 있는 상황은 온 것 같다. 암이 생존을 넘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론을 찾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루를 살아도 삶의 질,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