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지역암센터 주최 '암 희망 수기 공모전' 출품작
20년 전 연 10만여명이던 암 환자들이 현재 25만명에 이를 정도로 암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암 환자들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암은 이제는 예방도 가능하고 조기에 진단되고 적절히 치료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완치도 가능한 질환이 됐다. 이에 코리아헬스로그에서는 암을 이겨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통해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나의 투병 스토리> 코너를 마련했다. 이번 이야기는 광주전남지역암센터와 화순전남대병원이 공모한 암 환자들의 투병과 극복과정을 담은 수기 가운데 화순전남대병원에서 암 치료와 수술을 받은 환자들의 이야기들이다.
작년 12월 암이 재발했고 일흔다섯의 아버지는 ‘항암’을 시작했다.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폐암 수술 후 6개월마다 암 예후 추적검사를 해왔다. 검사는 순조롭고 안정적이었는데 3년째인 지난 11월, 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됐고 재검 후에도 결과는 같았다.
담당의는 항암을 당장 시작하자고 힘주어 말했다. 항암을 예약하고 집에 가는 길에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텅 빈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던 내가 기억난다.
그날 밤, 집은 떠들썩했고 고요했다. 갑작스런 소식에 다들 아버지를 걱정했다. 위로의 말이 오가고 당사자인 당신은 아무렇지 않아 했는데 정작 눈은 웃지 않았다. 점점 굳어가는 당신을 보고 나중에는 다들 말을 아꼈고 마침내 침묵했다. 사건은 다음 날 저녁에 일어났다.
당신은 해거름에 집에 돌아왔다. 한 손에 노란색 서류 봉투를 들고서. 봉투 안에는 단정하게 흰 셔츠에 검정색 자켓을 입고 찍은 당신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가족들이 의아해하자 당신은 머리를 긁적이고 뺨을 붉게 물들이며 말했다.
“항암 시작하면 머리가 빠진다기에….”
당신은 당신이 건강할 때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를 원했다. 그 사진이 훗날 자신의 영정사진으로 쓰이기를 바랐다.
겁이 많은 아버지가 홀로 삶의 마지막을 짐작하고 정리하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나는 한반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 당시 부재를 생각한 것만으로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뻔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서 아랫입술을 꽉 물었고, 다리에 힘이 들어왔을 때 더 이상 참지 못해 화장실에 가서 변기 물을 내린 뒤에야 한참을 울먹였다.
항암은 2주 간격으로 받았다. 다섯 시간을 받고 2주 뒤 한 시간을 받고 2주 쉬었는데, 6주가 한 주기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항암을 받을수록 무력해졌다. 살기 위해서 받는 항암이 오히려 당신의 일상을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무너트렸다. 항암을 받고, 이튿날이면 약 기운에 입맛이 없다며 겨우 서너 번 수저를 뜨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한 번만 더 드시라 했지만, 당신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끙, 소리를 내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만 먹겠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당신의 체중은 가파르게 빠졌다. 팔과 다리는 근육이 빠져나가 앙상했고 두 눈은 움푹 패여서 당신을 더 늙고 볼품없게 만들었다. 주위에 아버지의 암 투병을 알렸을 때 다들 ‘체중 감소’를 경고했다. 살이 빠지는 건 위험 신호라고 그러니 잘 먹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어머니는 입맛을 돋을 수 있는 음식들을 해 먹였다. 주로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신은 몇 술 뜨다 말기를 반복했다. 식사 시간 내내 더 먹으라는 가족들과 그만 먹겠다는 당신과의 갈등이 이어졌고, 늘 갈등에서 질 수밖에 없는 가족들의 한숨 또한 계속됐다. 당신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늘어뜨린 구부정한 자세로 텔레비전만 봤다. 항암 후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는 겨우 몇 술 더 먹었다.
일반 항암을 받던 아버지는 올해 5월에 면역항암을 받았다. 유전자 검사 결과 ‘옵디보’가 당신과 적합성이 좋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지난 뒤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옵디보를 맞고 나서 작년부터 겨우 이어오던 삶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렸다. 툭하면 ‘이렇게 살아서 뭐한다냐’며 당신은 거실 소파에서 매일 자거나 눈 뜨면 눕기를 반복했고, 누가 부르면 힘들게 고개를 돌려서 절망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그 텅 빈 눈빛은 ‘나는 환자니까 아무 말 마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말 대신 우리는 밥을 권했다. 먹어야 산다고 끼니때마다 당신에게 갓 지은 밥을 권했지만, 당신은 일관성 있게 서너 숟갈 뜨고 말았고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아버지에게 적합하다는 면역항암은 효과적으로 암세포의 크기를 줄여나갔다. 다만 암세포뿐만 아니라 당신 몸의 면역세포까지 송두리째 뒤흔든 탓에 그 부작용으로 당신의 오른쪽 눈은 어느 날 반쯤 감긴 채 떠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돌아오겠지, 다들 생각했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심한 날에는 눈을 전부 덮기도 했다. 그럴 때면 당신은 감긴 눈을 손으로 직접 떼어냈는데, 떼어진 눈꺼풀은 다시 반쯤 감겼다. 담당의는 항암 부작용이라며 항암을 그만두면 자연스레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항암을 그만두는 날을 떠올렸다. 암이 소멸하거나 아버지의 체력이 다 하여 더는 받을 수 없는 경우인데, 나는 당신의 삶을 엉망으로 만든 암이 자연 소멸하여 그만두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면역체계는 꾸준히 망가져 갔다. 항암제 투여는 이를 재촉했다. 매일 지쳐가는 당신도 그걸 지켜보는 우리도 손 쓸 수 없는 무력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신을 지켜줄 거라 믿었던 항암에 속절없이 기운을 빼앗길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힘겨워하는 당신을 위해 항암을 얼마간 쉬어가자는 말이 나왔고, 결국 다음 진료일에 얘기하기로 결정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8월 한여름 말복으로 한낮에는 폭염이 밤에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당신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항암에 거짓말같이 적응했다. 이제야 받아들일 힘이 생긴 걸까. 그 뒤로 아버지는 자주 앉고 자주 돌아다녔다. 어느 날은 모임에도 다녀왔다. 굳었던 얼굴이 풀어졌고 자주 웃었다. 당신이 이렇게 웃음이 많았던 사람인가, 생각했을 정도다.
아버지가 기운을 차린 뒤 어느 주말 저녁이다. 처서가 지나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저녁을 먹고 상을 치우고 주말 드라마를 보는 중, 문득 ‘사는 게 고통이었어’라고 아버지가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나는 잠자코 들었다.
“매일 무언가가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어. 그건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았지. 이러다 죽는 걸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어. 아마 그때부터 나는 체념이라는 걸 했을 거야. 너희들이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당시 나는 어쩔 수 없었던 거 같아. 그래야 내가 겨우 살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당신은 다시 드라마에 집중했다. 나는 뭐라 말하려다 이번에는 내가 입을 꾹 닫았다. 겨우 살았다는 말이 귀에 맴돌았다. 아버지의 삶은 위태로웠다. 당신은 발버둥을 쳤고 애써 살아남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그런 당신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 쉬고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당신의 최선이 우리가 찾는 최선과 달라서 당시에는 갈등이 생겼고 그래서 환자도 보호자도 함께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픔을 공유하며 겨우 살아왔던 것이다.
며칠 전 아버지는 항암을 받았다. 여전히 부작용으로 눈꺼풀이 반쯤 감겨있다. 걸음이 더디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 다만 전보다 자주 웃고 자주 말한다. 끼니때면 반쯤 담긴 밥을 다 비우고 과일까지 챙긴다.
암이 소멸하여 항암을 그만두는 날까지 당신의 건강과 의지가 꺾이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혹여 흔들리더라도 그때는 당신의 최선과 우리의 최선이 서로 맞닿아 함께 가는 방향을 찾기를 나는 바란다.
끝으로 당신 혼자서 가시밭길을 비틀거리며 걷지 않기를 나는 또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