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리스크 완화 논의 방향 잘못됐단 지적 쏟아져
영국·호주·프랑스 등 의료사고 배상 국가 책임제
“건강보험 강제지정제이면 의료사고 책임도 정부가”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은 지난 10일 용산구 회관에서 '합리적 으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방향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청년의사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은 지난 10일 용산구 회관에서 '합리적 으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방향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다. ⓒ청년의사

정부가 필수의료 분야 ‘사법 리스크’ 완화 방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의료계는 방향을 잘못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필수의료를 망가뜨리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사고처리특례법’도 의료계가 지적했던 사법 리스크 완화 방안을 담고 있지 않다며 “양두구육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배상공제조합이 지난 10일 용산구 회관에서 개최한 ‘합리적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방향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에서는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로 논의 중인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방안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변호사 출신인 단국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박형욱 교수는 “의료계 요구의 핵심은 민간의료기관을 강제로 건강보험에 동원해 국가 의무를 대행하게 한다면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정부가 져야 한다”며 “정부는 벼랑 끝 필수의료를 살린다면서 필수의료를 벼랑 끝에서 밀어 버리고 있다. 진정한 대화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필수의료 살리기라며 추진하는 정책이 양두구육이기 때문이다. 의료사고처리특례법도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영국과 호주, 프랑스 사례를 제시하며 의료사고 배상책임을 의사 개인이 아닌 국가가 지거나 의료배상책임보험 가입을 재정적으로 지원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영국은 국영의료체계로 국민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 소속 병원에서 발생한 의료사고에 대한 배상책임이 국가에 있다. 민간 영역에서 발생한 의료사고는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다.

호주는 공공의료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의 경우 의료사고 발생 시 정부가 배상책임을 지거나 법에 의해 배상책임을 해결한다. 민간 병원 의사도 보험료 지원 제도(Premium Support Scheme)에 따라 보험료 일부를 지원받는다. 전문인배상책임보험제도를 운영하는 프랑스는 정부가 관련 비용을 지원한다.

이들 국가는 의료과실로 의사를 형사 처벌하는 사례도 극히 드물었다. 영국은 의료과실로 기소된 의사가 한 해 평균 1.2명이며 유죄 판결은 0.7명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2017년 기준 의료인을 형사기소한 사건은 12건이며 이 중 67%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고의로 범죄를 일으킨 사례도 포함된 통계다. 반면 한국은 매년 의사 762명이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되고 있다. 하루 평균 2명꼴이다(관련 기사: 매일 의사 2명씩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됐다).

박 교수는 “의료과실에 대한 형사처벌을 남발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동해보복 관념에 기초한 것”이라며 “환자에게 정말 필요한 필수의료의 몰락을 초래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의료계가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이 아닌 의료사고 국가책임제를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 교수는 “의료계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이 원칙이 될 수 없다. ‘민간의료기관을 강제로 건강보험에 동원해 국가 의무를 대행하게 한다면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은 정부가 지라’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며 “계약에 기바한 영국, 호주, 프랑스 의료체계와 달리 요양기관 강제지정제에 기반한 의료체계에서 의료사고는 의료인의 고의 중과실이 아니라면 정부가 책임지는 게 합당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증질환 분야 등만 필수의료로 정의해 특례법을 적용한다면 요양기관 강제지정제를 철폐하고 온전한 계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도 했다.

의협 의료배상공제조합 토론회에 참석한 각 분야 전문가들은 사법 리스크 완화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년의사
의협 의료배상공제조합 토론회에 참석한 각 분야 전문가들은 사법 리스크 완화 방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년의사

의협 의료정책연구원 문석균 부원장은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해서는 기소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예상되는 국민 반발은 의료계 내부 자정 노력으로 신뢰를 쌓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문 부원장은 “환자 입장에서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라면 국가가 먼저 배상해야 한다. 만약 조사 결과 범죄 혐의가 발견되거나 추후 확정되면 구상권을 행사하면 된다”며 “독립적인 면허관리국을 설립해 의사면허관리뿐만 아니라 의료사고 관련 범죄 혐의 여부도 조사하면 국민 신뢰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국의료법학회 장욱 총무이사(연세대 보건대학원)는 “영미권이나 다른 선진국에서 의료사고로 형사고소하지 않는 이유는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적인 차이”라며 “한국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형사고소를 하는 이유가 민사소송에서 제대로 보상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장 이사는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 있지 않고 의료인과 환자 간 대립구조로만 보면 소송은 많아질 수밖에 없다”며 “일정한 보상을 받겠다고 선택하면 소송 제기를 제한하는 등 획기적인 제도를 설계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리아헬스로그 자매지 청년의사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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