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욱 희귀질환 톺아보기] 분당차여성병원 유한욱 교수
사람은 태어나서 신생아기를 지나 영•유아기,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결국 완숙한 성인으로 진입한다. 각 단계에서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정신심리, 신체적 발달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돼야만 정신과 신체가 건강한 성인이 될 수 있다. 성호르몬의 분비가 증가하여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 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를 사춘기라 하는데, 이러한 사춘기의 이른 시작은 보통 여아에서 흔하며 특히 사춘기가 병적으로 일찍 오는 것을 성조숙증이라 한다.
최근 아이들의 사춘기가 빨라지면서 고민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춘기가 빨리 왔다고 해서 모두 치료가 필요한 성조숙증은 아니다.
성조숙증은 여아의 경우는 만 8세 이전에 젖가슴 발달이 시작된 경우, 만 9세 이전에 음모가 발달한 경우, 만 9세 6개월 이전에 초경이 시작된 경우다. 남아는 만 9세 이전에 고환의 용적이 4 mL(성인 엄지손가락 끝마디 정도의 크기) 이상인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춘기 시작연령도 민족적인 배경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백인보다는 히스패닉, 또는 흑인 아동의 경우가 더 빠르고, 북부아시아인보다는 동남아시아인의 경우가 빠르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연령(pubertal timing)의 유전력은 보고에 따라 다르나 50~80%다.
하지만 연령의 분포를 보면 인간의 다른 보편적인 형질(키, 몸무게, 지능 등)과 같이 정규분포를 이루는 벨 모양을 보인다. 평균연령에 해당하는 사람이 가장 많고 사춘기가 아주 빠르거나(성조숙증), 또는 아주 늦은(사춘기 지연) 사람들의 분포는 곡선의 양극단에 분포한다. 이는 사춘기 시작 연령에 관여하는 수많은 유전자가 있고 환경적인 요인이 어우러져서 결정되는 다유전적(polygenic)인 속성임을 뜻한다.
전장유전체연합연구(genome wide association study: GWAS)에 의해 현재까지 약 1,000개가 넘는 유전자가 사춘기 시작 연령과 관계 있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유전력의 10% 정도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여러 환경적인 요인(내분비계교란물질, 비만도의 증가, 스트레스 등)이 함께 작용함이 물론이다. 대부분의 성조숙증의 원인은 여러 환경적 요인과 유전적 요인이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차세대염기서열 분석기법의 발달로 매우 드문, 전적으로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해 초래되는 유전성 성조숙증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예들 들면 MKRN3, DLK1 유전자 이상에 의한 유전적 성조숙증이다. 이들의 분자유전학적인 발병 기전이 매우 독특한데 일반인들이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유전체각인현상(genomic imprinting)이 관여한다. 쉽게 설명하면 성조숙증이 발병한 아이들의 돌연변이는 반드시 아버지 쪽에서 물려받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돌연변이를 어머니(환아들의 할머니)로 물려 받았을 때는 보인자 상태로 무증상이나 아버지(환아들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다면 성조숙증 환자였을 것이다. 이들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성조숙증이 발생한 여자환자는 성인기에 이 유전자돌연변이를 자녀에게 물려줄 확률은 50%이나 자녀는 모두 무증상이다. 또한 성조숙증 남자환자가 결혼하여 이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물려줄 확률도 50%이며, 이들은 성조숙증이 발현한다. 즉, 남자를 통해 돌연변이가 전달될 때만 발현한다.
각인현상은 생식세포형성시기에 부계, 모계 중 어느 쪽에서 유래된 유전자인 것을 알 수 있도록 표시가 되는 현상이다. 유전체각인현상은 사람의 다양한 질환에 관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유전자가 각인현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진화론자들은 이런 현상을 정상적인 부계(남자) 유전자는 자녀를 늦게 성숙하게 하여 오랜 기간 엄마 품에 있게 하는 역할을 하며,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빨리 성숙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모계 유전자(여자)는 빨리 자녀를 성숙시켜 돌봄의 역할을 빨리 완료하고 싶어한다고 설명한다. 즉, 남자의 유전자는 사춘기를 늦추려 하고 여자의 유전자는 사춘기를 앞당기려는 팽팽한 갈등관계에 있다는 재미있는 해석이다.
최근 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아지면서 성조숙증이 아닌데도 사춘기를 늦추는 무분별한 치료가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성조숙증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중요하다. 어린 나이에 2차 성징이 빨리 나타나면 정상 아이들보다 빨리 성장하여 갑자기 성장 속도가 증가(연간 7~8cm 이상)한다. 사춘기 초기에는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잘 자란다. 하지만 골연령이 증가하여 성장판이 조기에 닫혀서 성장이 멈춰지므로 결국 최종 성인 신장은 작아지게 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성조숙증이 아닌데도 치료한다면 아이의 성장을 오히려 저해할 수도 있다. 진단이 확실한 경우에만 치료를 하는 것이 권장된다. 외래에 방문하게 되면 출생 체중과 신장, 부모의 사춘기 발현 시기 등을 파악하게 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모가 과거에 사춘기가 늦게 오고, 성장 지연이 있었다면 자녀도 늦게 자랄 가능성이 크고, 부모의 사춘기가 빨랐다면 자녀의 사춘기도 빨리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성조숙증 환아의 가족력을 보면 사춘기가 빠르게 시작된 가족력이 1/3 이상에서 관찰된다는 보고도 있다. 가계에 따라 꽃이 일찍 개화하는(?) 소위 조생형(early bloomer)일 수도 있고, 늦게 시작되는 만생형(late bloomer)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진료 시 어머니가 몇 살 때 가슴이 나오기 시작하고 몇 살 때 초경이 있었는지, 아버지가 몇 살 때 변성기가 오고, 몇 살 때부터 면도를 하기 시작했는지, 몇 살 때부터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는지도 물어보게 된다.
외국 학계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증가한 한국 소아의 성조숙증에 많은 관심을 표한다. 그런데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엄밀한 학문적 정의에 근거한 성조숙증보다는 여아의 경우 만 8~9세, 남아의 경우 만 9~10세에 시작된 조기 시춘기를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성조숙증억제 치료가 최종적인 키에 미치는 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
그간 학회에서는 보험급여를 학문적 기준에 맞추어 엄격히 적용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창피하게도 정부가 부모님들의 민원에 밀려서(?) 그 동안 하지 못했던 것을 다행히 올해부터는 엄격한 학문적 기준에 맞추어 치료를 하게 됐다. 즉, 이차성징의 발현시기, 증가된 성장속도 및 골연령, 내분비검사결과 등 모두가 일치해야 한다.
여아들의 젖가슴 발달이 과거와는 달리 빨리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젖가슴이 나왔다고 금방 초경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젖가슴이 나오면서 2~3년간 급성장이 이루어지고 그제서야 초경이 시작된다. 초경이 시작되면 키가 자라는 속도는 현저히 감소하고 체중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정상 성장, 발달을 잘 알고 있어야 불필요한 치료와 걱정을 하지 않게 된다.
유한욱 교수는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마운트 시나이병원 유태인 유전학센터에서 연수한 뒤 미국의학유전학전문의를 취득했다.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클리닉 소장을 거쳐 소아청소년병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분당차여성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한소아내분비학회장, 대한의학유전학회 이사장, 복지부 선천성기형 및 유전질환 유전체연구센터장, 진흥원 희귀난치병정복사업 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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