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 '유전상담서비스 활성화 방안 모색 위한 토론회' 열려
환자·가족들 유전성질환 제대로 알 길 없어…'알 권리 보장' 촉구
60명 넘는 상담사 배출…"인프라 있지만 의료행위로 인정 안 돼"
일본, 비급여로 유전상담 이뤄져…국내서도 비급여라도 시작을
질병청, 유전상담체계운영지원사업 중…政, 제도권 진입 고민 필요
어느 날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유전성희귀질환을 진단받는다면?
아마 그 순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게 뭔지 처음으로 체감한 날일 수도 있고, 십중팔구는 머리가 하애져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국내 대학병원의 '3분 진료' 실태로 봤을 때, 이때 의사는 충격을 받은 환자와 가족의 상황을 감안해 진료하기 어렵다. 의사는 환자와 가족에게 꼭 필요한 의료정보들을 촉박한 시간 내 모두 집어넣기 위해 최선을 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의 머릿속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다.
진료실을 나온 환자와 가족의 하얗게 질린 머릿속에 남는 것은 대부분 병명뿐이다. 혹 너무 길고 어려워 머릿속에 집어넣기 어려운 낯선 병명은 환자의 손에 든 메모지 속에 영원히 의문으로 남을지 모른다.
이것이 국내 65만명 이상의 유전성희귀질환자(전체 희귀질환의 80% 이상, 국내 희귀질환자 80만명)와 그 서너 배 되는 가족들이 겪는 현실이다.
'유전성'이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에 환자의 걱정은 자신의 몸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부모는 자식에게 유전자를 대물림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고, 같은 유전자가 또 다른 생명에게 전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젊은 부모는 둘째 낳기를 포기하며 형제자매는 행복한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관문인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병의 정확한 원인을 모르는 탓에 문제의 유전자가 누구 것이냐를 두고 끝없이 다투다 가정은 흔히 붕괴되고,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려는 가족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국내 유전의학 전문 의료진은 유전자검사 뒤 제대로 유전상담만 받아도 이런 문제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같은 현실은 현재 요원하다. 제도에 막혀 국내에서는 유전상담 서비스를 제대로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같은 현실은 지난달 31일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과 한국희귀질환재단이 공동 주최하고 질병관리청과 코리아헬스로그가 공동 후원한 '국내 유전상담서비스 활성화 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서 다시금 조명됐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유전성희귀질환 환우 가족들은 환우와 가족들의 실제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유전성희귀질환 진단 직후부터 전문지식과 카운셀링 능력을 갖춘 전문 유전상담사에 의한 유전상담 서비스가 국내에서 활성화돼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엔젤만증후군 아들을 둔 희귀질환재단 조애리 이사는 "유전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유전상담을 받은 분들이 너무 부럽다"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이가 벌써 스무 살이지만 피상적으로만 알지 아이의 질환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했다.
어떻게 부모가 아이의 병에 대해 모를 수 있을까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무엇보다 희귀질환은 의료정보도 희귀하고, 일반적인 의료정보보다 더 어려워 의료진조차 정확히 병에 대해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양육자인 환우 어머니 중심으로 경험에 근거해 아이에 대한 정보를 나누거나 희귀하게 나오는 국내 의학 논문을 찾아보거나 외국 문헌을 번역하는 수준으로 병에 대해 피상적으로 아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조 이사는 "엔젤만증후군 환아의 부모 대상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의견이 질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고 싶다는 것"이라며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 이것이 유전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엄마 탓인지 아빠 탓인지 하다 가정 싸움이 너무 빈번해 가정이 붕괴되는 사례도 너무 많다"고 현실을 짚었다.
이뿐 아니다. 조애리 이사는 "아이는 살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대처해 나가고 그 다음에는 뭘 해야 되는지 알 수 없다"며 "또 동생의 장애로 인한 부담 때문인지, 큰 아이는 결혼을 안 한다고 한다. 그 마음 속에 무엇이 있을까 추측해보면 우리 둘째가 있고, 이 질환이 유전되는 게 아닐까에 대한 부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근심했다.
올해 스물세 살의 두센근이영양증 아들을 둔 엄춘아 씨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엄춘아 씨는 둘째의 돌 무렵 두센근이영양증 진단 뒤 어쩔 수 없이 뱃속 아이를 유산했다.
엄 씨는 "10년 뒤 희귀질환재단에서 유전상담을 받으면서 우리 아이에게만 발현된 돌연변이어서 유산시킨 태아는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는 것을 알았다"며 "유전상담 서비스는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산시킬 수밖에 없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또 유전성희귀질환 환우의 가족들은 국내에서 유전상담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다.
엄춘아 씨는 "우리 아이의 돌연변이로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올해 서른 살이 된 큰 아이가 딸이 있다보니 유전상담은 끝이 없을 것 같고, 또 우리 아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혹시 또 나타나지 않을까 불안하다"며 환자의 알 권리를 위해 유전상담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게 제도화가 절실하다고 짚었다.
유전상담을 하지 않고 병원에서 그냥 의사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흔히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엄 씨는 "지금도 3개월, 6개월마다 병원 외래를 다니고 있지만 진료 시간은 길어야 5분도 되지 않는다"며 "의사에게 유전상담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국내 유전의학의 토대를 쌓은 희귀질환재단 김현주 이사장도 "국내 의료현장에서는 가족 내 재발하거나 대물림될 수 있는 희귀난치성질환의 특성을 고려한 효율적인 관리와 예방 차원의 의료서비스로 유전상담 서비스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며 "유전성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은 유전상담을 통한 정확한 유전정보와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현상황을 지적했다.
대학병원마다 유전성희귀질환을 진료하는 의료진이 있는데, 국내 유전성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상담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정적 원인은 유전상담 서비스가 의료행위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질병청의 지원으로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과 이범희 교수가 지난해 3월부터 올해까지 '희귀질환 예방관리를 위한 진료지원 체계 연구'를 진행한데 따르면, 유전상담 관련 의사의 평균 진료 시간은 8.9분, 유전상담 소요시간은 43.5분, 유전상담 준비시간은 66.0분이었다.
길어야 5분을 넘지 않는 국내 대학병원 진료 시스템에서 별도의 의료행위로 인정되지 않은 유전상담 서비스를 위해 의사가 2시간에 이르는 시간을 내는 것이 현실에서 가능할까.
김 이사장은 "진료시간이 5분 정도에 불과한 국내 대학병원의 여건 상 의사가 30분 이상 소요되는 유전상담을 급여 없이 제공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유전성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이 유전상담을 받을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김 이사장은 "의사(임상유전 전문의)와 유전상담사가 하나의 유전상담팀을 구성해 진단은 유전자검사 결과를 토대로 의사가 내리고 상담과 소통은 유전상담사가 하도록 하면 환자와 가족들이 의학적, 유전학적, 심리적, 사회적 측면에서 질환을 충분히 이해하고, 희귀질환에 적응해 살아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선행돼야 하는 과제가 있다. 바로 국내 유전상담 서비스를 가로막는 결정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김현주 이사장은 "유전상담 의료행위 코드가 없기 때문에 유전상담을 자기 돈을 들여서 받고 싶은데도 받을 수 없는 것"이라며 "현재 전문 유전상담사가 국내 60명 넘게 배출돼 있고 그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도록 의료서비스 코드가 나오면 국내 유전상담 서비스가 활성화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유전성희귀질환자 가족을 비롯해 의료진이 이를 위해 건강보험에서 추가 재정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김 이사장은 "처음부터 유전상담 서비스를 급여해달라는 게 아니다"라며 "유전상담 서비스를 의료서비스로 제도권 안에 넣어서 코드를 만들면 된다고 생각을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일본의 유전상담 교육과정과 유전상담 의료서비스 현황'을 발표한 아주의대 의학유전학과 정선용 교수에 따르면, 일본은 현재 임상유전 전문의와 우리나라의 유전상담사 격인 인정유전카운슬러가 팀을 이뤄 유전상담 서비스를 '비급여'로 제공하고 있다.
비급여의 특성에 따라 일본의 병원마다 받는 유전상담 비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가장 고가의 유전상담서비스를 제공하는 도쿄대학병원의 경우에도 초진이 1시간에 1만2,940엔(약 13만원), 재진이 1시간에 9,820엔(약 10만원, 30분당 약 5만원)이었다.
이날 유전성희귀질환 환자와 가족들은 제대로 '유전성희귀질환'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한 과외비용으로 이만큼의 비용을 치를 충분한 의사가 있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유전상담 서비스 제도화에 힘을 실었다.
정선용 교수는 "변화를 싫어하는 일본조차도 유전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금 활발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제도화만 된다면 엄청나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를 대표해 토론회에 참여한 질병청 희귀질환관리과 이지원 과장과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 정성훈 과장 역시 희귀질환 환자와 가족을 위한 유전상담 서비스 필요성에 공감을 표했다.
이 과장 "희귀질환 환자 확진 시 가족 내 잠재적 환자 보인자 등 고위험군의 선별을 통한 예방적 관리를 위해서는 유전상담이 진료 현장에서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며 "유전상담이 환자와 가족에게 아직까지 미충족 수요로 남아 있는 부분들이 많아 관련 지원 정책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부분 역시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원 과장은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올해 처음 정부 주도로 유전상담체계운영지원사업을 시작했다"며 "이 사업은 그간 의료현장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이뤄졌던 유전상담의 표준체계를 갖추고 상담의 질을 높이며 기관별 편차를 줄여 전문적 유전상담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또 올해부터 기존 진단 지원 사업을 유전상담 등 후속 지원 사업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통합적 진단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며 "환자가 어느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지 관계 없이 거주지 중심으로 이러한 통합적 진단 지원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과장은 "이러한 유전상담 지원 사업을 비롯한 사업의 확대와 거주지 중심의 통합적 진료 지원 체계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환우와 가족,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성훈 과장도 "국민의힘 이명수 의원의 발의로 최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희귀질환관리법 내에서 유전상담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도 "유전상담 제도화에 앞서 논의돼야 할 부분들이 있어서 고민해보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신현영 의원은 "유전상담은 환자와 가족에게 의학적, 심리적 이해를 돕는 소통의 과정"이라며 "국제표준에 맞춰 희귀질환 유전상담서비스가 활성화되고 환자와 가족들에게 실질적이고 전문적인 유전상담 서비스가 제도적으로 안착될 수 있게 힘을 모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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