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션트 스토리]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김진혜 회장
흔히 루푸스라 불리는 '전신홍반루푸스'는 천의 얼굴을 지닌 희귀난치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 고장으로 면역에 간여하는 세포와 물질들이 피부, 신장, 근골격계, 혈액계, 면역계, 신경계, 심폐계 등 스스로의 몸을 공격하면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면역 세포와 물질들이 어디를 어떻게 선별해 공격하느냐에 따라 증상이 천차만별인 까닭이다.
25년 전 루푸스 진단을 받은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김진혜 회장(45)은 혈액 응고에 간여하는 혈액세포의 하나인 '혈소판'이 공격을 당하면서 '혈소판감소증'으로 발병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생리가 안 끝나고 세수만 해도 코피가 콸콸 쏟아지고, 나중엔 눈에서도 피가 새어나왔다"며 "열이 나고 출혈 증상이 심한 상태에서 출근길에 쓰러져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가 진료 2번만에 병을 진단받았다"고 말했다.
20대 초반, 첫 직장 출근 3개월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김진혜 회장은 여동생이 중학생 때 루푸스 진단을 받아 진단방랑 없이 병을 진단받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 '천의 얼굴'을 지닌 희귀난치질환 루푸스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아 앞이 막막했다. 또 루푸스로 컨디션이 악화된 상태에서 고용량스테로이드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휴직까지 해야 했고, 복직 뒤 낙인 효과에 직장을 옮기는 변화무쌍한 시간을 보냈다.
그쯤 김 회장의 아버지가 신문에 난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고(故) 정미홍 초대회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일간지를 스크랩해 그녀에게 건넸다. 루푸스에 대한 정보를 찾기 쉽지 않았던 때, 희귀난치질환인 루푸스를 이겨낸 사례가 공신력 있는 국내 일간지에 소개된 것이기에 1998년 5월 김진혜 회장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당시 루푸스 환우모임 사무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고 정 회장을 만나게 됐다.
고 정미홍 회장은 KBS 아나운서로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방송언론과정을 연수 중이던 때 루푸스 진단을 받고 루푸스 신염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한 뒤 증상이 개선이 되면 루푸스 환우들을 위해 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입국한 뒤 그녀는 루푸스에 대한 외국 자료를 번역해 병원 외래에 있는 루푸스 환우들에게 나눠주다가 1997년 환우모임까지 만들며 본격적으로 루푸스 환우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게 됐다.
국내 유일한 루푸스 정보 공유의 장이 됐던 그 사무실에서 김 회장은 꽤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는 "루푸스로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큰 힘이 됐다"며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1년에 한 번 환우모임 송년회에 참여하고, 루푸스 잡지 등을 만들 때 교정 일을 할 겸 주말에 사무실을 방문한 게 전부였지만, '혼자가 아니다'라는 마음으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 사이 루푸스 환우모임은 사단법인 '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 루이사가 됐다. 1999년 7월 1일의 일이다. 고 정미홍 회장의 지도력으로 협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협회가 만들어진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2008년엔 회원이 약 2,500명에 달할만큼 커졌다. 그쯤 김진혜 회장은 루푸스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김 회장의 면역 세포와 물질들의 공격 대상은 피부였고, 그 결과는 그녀에게 치명적이었다.
김진혜 회장은 "그 전까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면서 기복이 있었지만 잘 넘어갔는데, 과로를 하면서 피부에 걷잡을 수 없는 발진이 불에 탄 듯이 올라왔다"며 "수두와 같은 피부 증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휩쓸어 너무 무서웠고, 고통이 1년 6개월 넘게 지속됐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얼굴까지 변해버리면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만큼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고 정 회장이었다. 대기업에서 기획·관리를 해본 김진혜 회장을 도와달라는 말로 루이사로 이끈 것이다. 당시 2,500명을 넘어선 환우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했고, 루이사 홈페이지 리뉴얼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 회비 자동이체시스템도 구축하고, 루이사에서 발행하는 잡지나 자료 등을 비롯해 환우회 모임과 환우상담 등 협회 규모가 커진만큼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루이사는 루푸스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을 위해 매년 4회 루푸스 전문 잡지를 발간하고, 루푸스 환우들에게 꼭 필요한 소책자들을 제작, 보급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했다. 또, 대학병원 외래에 리플렛을 비치하고, 매년 전국 10곳이 넘는 대학병원에 한 번씩 루푸스 세미나를 열며 전국의 환우들이 만성자가면역질환인 루푸스를 잘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루푸스로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든 상태였지만, 김 회장은 첫 진단 뒤 '과거의 자신'과 같은 혼란스런 처지에 놓여있는 환우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마음이 끌렸다. 또,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환우들이 모인 단체였기에 서로의 병에 대해 이해와 관용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당시 피부 루푸스 증상으로 힘겨워하던 그녀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루이사 합류 뒤 그녀는 총괄 부장처럼 협회의 모든 일을 챙겨왔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고 정 회장에게 많은 것을 배우며 루이사의 핵심 참모로 역할을 했고, 2018년 폐암 투병 끝에 사망한 정 회장을 이어 그해 11월 루이사 회장을 맡게 됐다. 강력한 리더십으로 루이사를 이끈 고 정미홍 회장의 공백을 모두 메울 수 없다는 두려움이 컸었지만, 루푸스 환우들이 기댈 수 있는 '공간'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그녀는 회장직을 맡게 됐다고 한다.
고 정미홍 회장 주도로 이뤄졌던 디너쇼 같은 루이사 후원사업이 끊기면서 예산이 크게 줄었지만, 그녀는 그간 루이사가 해왔던 출판사업, 상담사업, 세미나 개최, 의료비 지원사업 등을 지속하면서 회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활동을 더해 협회 활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그 아이디어의 실현이 2019년 2월 제주도에 오픈한 치유센터였다. 이는 루이사가 2010년대 초반부터 해왔던 숲치유 프로그램을 확장한 것이었다.
김 회장은 "숲치유 프로그램이 회원들에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관광지 개념이 강한 '제주'라는 특성 상 환우들의 치유프로그램 참여는 저조해 루푸스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며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면서 지난해 12월 문을 닫았고, 현재는 관심도가 높은 먹을거리에 대한 알려줄 수 있는 공간을 사무실을 겸해 준비 중이고, 9월 오픈 예정"이라고 말했다.
루푸스는 기복이 큰 만성질환이기 때문에 '어떻게 생활해야 병이 잘 관리되는지'에 대한 환우들의 관심이 높다. 그 중 가장 큰 게 먹거리에 대한 것이다. 근거가 없는 식이지침을 따르는 환우들이 적지 않아 건강한 식단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김 회장은 설명했다. 이외에 환우들의 주요 소통채널이 SNS가 되면서 루이사 홈페이지도 모바일 친화적인 환경으로 리뉴얼 중이며, 이달 말 오픈된다.
루이사에 이같은 변화를 주는 김진혜 회장의 속뜻은 무엇일까? 김 회장은 "루푸스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루푸스를 잘 관리하고 치료하는 것이기에 루이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소량의 약으로 관해기(무증상기)를 잘 이끌어갈 수 있게 다양한 방식으로 환우들에게 도움이 될 정보들을 제공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루푸스를 치료·관리하는데 역점을 두는 이유는 김진혜 회장의 뼈 아픈 경험도 한몫한다. 첫 발병 뒤, 그녀는 소량의 스테로이드제제를 복용해왔는데,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이 퉁퉁 붓고 머리카락이 빠지는데 특별한 루푸스 증상이 없이 유지되니 '막연히 약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연한 생각으로 약을 끊고 과로까지 하면서 심각한 피부 루푸스가 나타났다.
다른 이유도 있다. 김 회장은 "지금 경증 환자라도 관리가 잘 안 되면 루푸스 악화로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른다"며 "또 중증이 됐을 때 너무 많이 장기가 망가져 있으면 치료제조차 쓰지 못할 수도 있고, 나중에 루푸스 신약이 도입됐을 때도 몸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약을 쓰기 어려울 수도 있다. 때문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게 치료·관리를 잘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도적으로 루푸스 환우들이 병을 제대로 치료, 관리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한다. 김진혜 회장은 "루푸스는 2009년 산정특례를 받아서 급여가 되는 항목은 괜찮지만, 필요한 검사인데 아직 비급여인 검사가 많다. 또, 루푸스 환우 중에는 가임기 여성이 많은데 산부인과가 루푸스 협진이 안 되는 과로 분류돼 있다"며 "실제 환우의 입장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제도적으로 인정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재 1만2,700명이 넘는 루푸스 환우회 대표로서 희망하는 루푸스 치료 환경 개선 이슈도 있다. 현재 루푸스 환우의 10명 중 9명이 가장 심각하게는 대퇴골두괴사와 같은 부작용 위험이 있는 스테로이드제제를 쓰는데, 최근 스테로이드제제를 대체할 수 있는 신약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런 다양한 약제들이 환자 편이성이 높은 제제들로 국내 많이 도입되었으면 하는 것이 김진혜 회장의 바람이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한국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김 회장은 "희귀난치질환에 신약 급여를 할 때 흔히 인구 대비 경제성 평가를 하는데, 그것보다 그 약이 실제 도입됐을 때의 효과와 효능을 봐줬으면 좋겠다"며 "해외 사례도 좋고 여러 사례들을 보면서 실제 환우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넓은 안목으로 보고 판단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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