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션트 스토리] RP환우단체 최정남 회장 인터뷰
한국RP협회, 국내 실명질환 연구 기반 마련에 기여
민간 연구지원재단으로 키울 실명퇴치운동본부 운영
유전자분석사업 진행…의학자 모인 망막변성協 후원
첫 IRD 유전자치료제 '럭스터나' 하루 빨리 급여 필요

망막색소변성증(RP·Retinitis Pigmentosa)은 실명을 초래하는 대표적 유전성망막질환(IRD·Inherited Retinal Dystrophy)이다. 유전자의 문제로 빛 자극을 감지해 전기 신호로 변환하는 망막의 광수용체에 기능장애가 초래되면서 망막 기능이 떨어지다가 결과적으로 망막변성이 진행돼 실명에 이르게 된다.

7년 전만 해도 RP에 있어서 국내 공인된 치료법은 없었다. 20년 전에는 이 분야에 대한 국내 연구도 아주 미미한 실정이었다. RP 환우가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같은 대형병원에 가서 듣는 이야기는 하나 같이 절망적이었다. 

"치료법은 없습니다. 조만간 눈이 멀 겁니다."

2004년 6월 삼성서울병원 안과에서 RP 진단을 받은 한국RP협회 최정남 회장(68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골프를 치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공이 갑자기 안 보이고 시야가 좁아져서 주차하다가 접촉사고가 난 뒤에야 눈에 이상을 느끼고 병원을 찾아간 최 회장 역시 2~3시간의 안과검사 끝에 이 같은 말을 안과 교수에게 들었다고 한다. 

한국RP협회 최정남 회장. 
한국RP협회 최정남 회장. 

당시 시력이 1.2였던 최정남 회장에게 ‘실명 선고’는 날벼락이나 다름없었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병원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전화로 교수에게 들은 실명 선고 이야기를 했을 때, 아내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징한 현실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 포털 검색창에 망막색소변성증 일곱 글자를 쳤다. 곧 한국RP협회 홈페이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그곳에서 RP에 대한 정보와 함께 RP 환우의 여러 수기를 읽은 뒤에야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사업가로 활약하던 최 회장은 먼저 사업부터 정리했다. 실명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사업체를 제대로 운영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RP를 치료할 방법은 삼성서울병원 안과 교수 말대로 하나도 없었지만, 희망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눈이 잘 보이는 상태였고 의학 기술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연구를 통해 RP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을까 희망을 그리며 그는 구글을 통해 전 세계 RP 연구를 추적해갔다.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은 최정남 회장만이 아니었다. 실명 선고를 받은 대부분의 RP 환우도 치료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RP 환우들이 모여서 지난 2001년 3월 25일 만든 한국RP협회의 상징적인 첫 행보가 그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RP협회는 2002년 12월 14일 십시일반 RP 환우들의 돈을 모아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에 '인공망막연구기금' 100만원을 전달하며 그 의지를 보여줬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기에 최 회장은 RP협회 홈페이지에 독자적으로 추적한 글로벌 RP 연구에 대한 소식을 업데이트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공대 출신의 40대 중반 사업가에게 의학 용어는 다소 생소했지만, 하나둘 공부해가며 RP 연구에 대해 파고들었고 그것을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인 환우와 공유하며 처음으로 쏟아지는 '댓글'의 즐거움도 맛봤다고 한다. 

그는 곧 '조나단'이라는 필명으로 RP협회에서 가장 핫한 인물이 됐고 2005년 RP 환우들의 추대를 받아 뜻하지 않게 RP협회 회장까지 맡게 됐다. 회장이 된 그는 글로벌 RP 연구를 추적하며 알게 된 미국 실명퇴치재단의 활약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최정남 회장은 "이 재단은 RP 등에 대한 기초와 치료 연구에 무게 중심을 두고 학술적 지원에 중점을 둔 활동을 하고 있었다"며 "그 모습을 보며 환우들이 모인 민간단체가 그 질환에 대한 연구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방향성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로 RP 환우에게 제대혈 줄기세포 치료 시도

이 같은 인식 전환에 이어 사업가 기질까지 더해져 최 회장은 국내 RP 연구의 발판을 다지는 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마침 줄기세포 치료 열기가 뜨거웠던 때였다. 줄기세포에 대한 하이프(Hype)로 '10년이면 눈 뜬다'는 기대감이 2005년 RP 환우들 사이에 가득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여러 질환에 줄기세포 치료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RP 연구는 없었다. 

최정남 회장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환자단체라도 나서서 뭐라도 시도해보자는 RP 환우들의 뜻을 담아 줄기세포 연구를 해줄 안과 교수를 수소문했고, 그 해 5월 조선대병원 안과 최광주 교수와 뜻이 맞아 제대혈 줄기세포를 안구에 주사하는 치료에 대한 임상연구를 추진했다. 

이 연구를 허가 받기 위해 최 회장은 당시 식품의약품안전청을 쫓아다니고, 모든 RP 환우가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 임상시험의 대상자 선정 교통정리까지 도맡아 했다. 최 회장은 "전 세계에서 최초로 제대혈 줄기세포를 인간의 눈에 넣는 시도를 한 것이 우리 협회"라며 "결과적으로 실패한 임상연구였지만 실명 극복에 장벽이 여러 개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 장벽들을 넘어서기 위해 최정남 회장은 RP환우들을 대표해 바쁘게 움직였다. 2005년 11월 'RP유전체 역학조사 필요성 및 치료전망 세미나'를 열어 유전성망막질환인 RP의 원인을 찾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에 대해 논의했고, 여기에 정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그 해 12월 RP 예방 대책 수립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 인권정책연구회와 공동 주최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화답은 2년이 지난 2008년에 왔다. 보건복지부로부터 3억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국립보건연구원 유전체센터와 RP 환우에 대한 유전자분석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 지원금이 나올 때까지 RP협회는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2006년 민간 연구지원재단으로 키울 '실명퇴치운동본부'를 본격 출범하고 운영에 들어간 것이다. 

실명퇴치운동본부는 실명 퇴치를 위한 연구 기금 마련을 위해 출범 첫 해부터 후원 음악회를 연 데 이어 2007년에는 실명질환 연구 활성화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시각장애자 안구를 기증하는 캠페인 활동 등을 펼쳐왔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실명 퇴치를 위해 나서줄 의과학자를 모아 연구를 지원하는 활동도 시작했다. 

최 회장은 "유전자분석사업을 맡은 연으로 이어진 서울대병원 안과 의료진이 주축이 된 유전망막질환연구회 설립을 2010년부터 후원하며 국내 유전성망막질환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역할을 했다"며 그것이 22년이 넘는 RP협회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활동이라고 꼽았다. 

유전망막질환연구회는 지난 2015년 한국망막변성협회로 이름을 바꿨고, RP가 진행돼 끝내 망막변성으로 시력을 잃는 환자를 위한 치료법 연구를 위해 국내 의과학자 중심의 망막변성 연구 사업을 본격화했다. 

최정남 회장
최정남 회장

유전자분석사업 통해 RP '유전자검사' 급여 적용에도 역할 

최정남 회장은 주변이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고 중심시력으로 최대 교정시력이 0.4~0.5 정도까지 악화된 상황 속에서 RP협회와 실명퇴치운동본부를 함께 이끌며 꾸준히 망막변성협회를 후원, 국내 IRD 연구가 지속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또 RP 환우인 개그맨 이동우 씨와, 최정남 회장의 차녀 수영 씨를 비롯한 소녀시대 멤버들이 실명퇴치운동본부의 홍보대사로 활약하며 RP를 국내외 알리는데 큰 몫을 했고 기금 지원에 다각도로 나서며 국내 실명질환 연구에 기여해왔다. 

유전자분석사업은 2016년 순천향대병원 안과에서 4차까지 지속됐고, 점차 검사 비용이 저렴해져 보다 많은 유전자검사가 이뤄진 결과 많은 국내 RP 환자의 유전자 이상을 찾아내는 데 기여했다. 또 이 사업으로 유전자검사가 RP에 필수적인 검사라는 인식이 쌓이면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는데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최 회장은 미국 실명퇴치재단처럼 실명퇴치운동본부를 RP 등 여러 실명질환 신약을 만드는 개발사까지 지원할 수 있는 '실명퇴치재단'으로 성장시킬 꿈을 꾸고 있다. 

지난 20년간 국제망막협회를 비롯해 미국 하버드대학·워싱턴대학·UCLA·위스콘신대학·펜실베니아대학과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이뤄지는 신뢰도 높은 RP 연구를 추적하며 해외 연구진과 교류하고, 국내외 치료제 개발사들과 미팅하며 그의 생각은 더욱 굳건해진 것 같다.

글로벌 RP 연구의 현주소와 치료제 개발 동향을 RP 환우들과 공유할 목적으로 해온 일이 그의 리더십을 통해 국내에서 환자단체가 주도해 '실명질환 치료법'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최정남 회장은 “국내에서 실명퇴치 치료제 연구를 주도하는데 환우단체의 활동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환우단체는 임상연구 대상인 환자 풀(Pool)이 모여 있고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과제의 연구가 중복되게 이뤄지지 않게 교통정리를 할 수 있으며 재단 설립을 통해 효율적인 연구 지원이 이뤄지게 할 수 있다”고 그 이유를 꼽았다.  

체계적인 연구 지원을 통해 실명 퇴치의 꿈을 꾸는 단체의 수장인지라 그는 지난 1년 6개월 간 건강보험 급여 관문에 막혀 첫 IRD 유전자치료제 럭스터나(성분명·보레티진네파보벡)를 쓸 수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럭스터나는 RP와 함께 레베르 선천성 흑암시를 유발할 수 있는 ‘RPE65 변이’ 타깃의 IRD 원샷 유전자치료제다. 2017년 12월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승인된 이 치료제는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서 쓰이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2021년 9월 9일 허가됐지만, 9억5,000만원 상당의 이 약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가 이뤄지지 않아 노바티스에서 론칭을 미루고 있다. 

최정남 회장은 “럭스터나는 시세포들이 살아 있을 때 투여가 가능한 약인데, 벌써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약 10억원의 치료 비용으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골든타임을 놓쳐버리면 끝내 사회에서 복지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시각장애자가 되게 된다. 서둘러 한 명이라도 시력을 잃는 것을 막는 게 사회경제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점을 보건당국이 제대로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럭스터나는 제2, 제3의 IRD 유전자치료제 도입의 향방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있다"며 "정부가 약가 협상을 통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신약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30~40대 한참 일 할 나이의 IRD 환우가 시력을 잃지 않고 사회에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신약의 허가와 급여에 속도를 내달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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