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션트 스토리] 한국기면병환우협회 이한 대표

기면병은 뇌의 시상하부에서 분비하는 각성호르몬인 '히포크레틴'이 적게 나와 깨어있다가 아무 예고 없이 훅 잠에 빠져들게 되는 희귀뇌질환이다. 췌장에서 혈당을 낮춰주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혈당이 초래되는 당뇨병과 같은 원리로, 히포크레틴 분비 부족 때문에 수면발작을 포함한 '주간과다졸림'과 정신은 깨어있는데 갑자기 근육에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 같은 증상이 기면병 환자에게 나타난다.

인슐린이 사람의 의지로 조절되지 않는 것과 같이 히포크레틴도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간과다졸림과 탈력발작을 기면병 환우의 의지 문제인 양 오인한다. 기면병에 대한 오해는 이것만이 아니다. 기면병 환우에게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 위험이 조금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기면병 환우에게 정신질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면병의 장애진단 기준은 현재 정신질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기면병 전문 의료진은 히포크레틴 분비 문제로 기면증 환우의 약 10%는 주간과다졸림과 탈력발작이 굉장히 심해 집 밖을 나가지 못 하는데, 현재 잘못된 기면병 장애진단 기준 때문에 기면병 환우들이 제대로 사회보장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기면병환우협회 이한 대표도 "정신질환 유무와 관계 없이 보호가 필요한 기면병 환우가 장애진단을 받을 수 있게 제도 개선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기면병환우협회 이한 대표
한국기면병환우협회 이한 대표

사실 기면병환우협회는 기면병의 잘못된 장애진단 기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제껏 많은 일을 해왔고, 올해는 장애진단 기준이 제대로 바뀌지 않을까 긍정적인 예측도 해보고 있다. 지난 2023년 당시 국민의힘 이종성 의원이 주선한 보건복지부 담당자와 기면병환우협회의 미팅 자리에서 기면병의 장애진단 기준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해 검토해보겠다는 복지부 담당자의 약속을 받아낸 까닭이다.  

기면병 환우의 장애진단에 대한 복지부의 연구용역의 결과는 올해 개정을 앞둔 '장애 정도 판정 기준'에도 반영될 것으로 현재 예측되고 있다. 이한 대표는 "올해 '장애 정도 판정 기준'이 개정되는데, 기면병 전문가 의견이 연구용역 결과에 반영돼 제대로 개선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애진단 기준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으면 결국 기면병 환우는 해고 등으로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사각지대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이는 사실 현재 기면병 환우들이 마주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지난 2004년 기준으로 장애 판정을 받은 기면병 환우는 4명 밖에 안 됐다. 사회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기면병 환우는 많은데, 지금 너무 극소수로 좁혀져 있다. 더구나 다른 정신질환이 동반된 환우는 그냥 정신질환으로 장애 판정을 받으면 되지 굳이 기면병으로 장애 판정을 받을 이유도 없다"며 기면병 장애 진단 기준이 올해 꼭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면병은 장애 판정 기준만이 문제가 아니다. 진단, 치료, 관리 여건 모두가 현재 열악하다. 지난 2007년 한국기면증환우협회로 창립한 기면병환우협회가 그간 목소리를 내면서 2009년 기면병이 희귀질환으로 지정되고, 2010년 국방부 병역판정검사 규칙에 기면병 항목이 신설돼 증상이 심할 때 '군 면제'가 가능한 질환이 되면서 이전보다 나아졌지만, 기면병은 희귀질환이라는 한계로 아직까지 진단조차 쉽지 않다.

지난 2006년 기면병 진단을 받은 이한 대표도 초등학교 때부터 기면병 증상이 생겼지만, 실제 병원에서 기면병을 진단받은 것은 20대 중반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잠 많은 아이'로 유명세를 탔고 기면병으로 늘상 머리가 맑지 않아 꿈과 현실을 자주 혼동하기도 했으며 탈력발작으로 웃거나 울거나 흥분한 상태 그대로 수 분간 멈추는 증상이 있어서 어머니와 함께 정신과 진료를 보러 간 적도 있지만, 기면병 진단은 받지 못했다.   

비염과 아데노이드비대증으로 밤에 잠을 못 잔 것이 낮에 잠을 자는 원인이 아닐까 여겨 계속 병원을 다니고, 한의원도 다녔지만 기면병은 어떤 곳에서도 단 한 번 언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기면병을 진단받은 것은 서점에서 읽은 책 한 권 덕분이었다. 이 대표는 "서점에 갔는데, 마침 수면 관련 대중서적이 나와 있었다. 그 책에 기면병 챕터가 있었고, 그 부분을 봤는데 '난데'라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갔다"며 그 순간을 회상했다.

지금도 그처럼 적지 않은 기면병 환우가 긴 진단방랑을 거쳐 진단되기도 하지만, 과거보다 진단 환경은 나아졌다. 이한 대표는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전국 대학병원에 수면검사시설이 있는 곳은 손에 꼽혔는데, 지금은 대학병원만이 아니라 의사 개인이 운영하는 수면클리닉에도 수면검사시설을 많이 갖추고 있어 기면병을 진단받을 수 있는 환경은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기면병에 대해 잘 모르는 의료진이 많다"고 현실을 짚었다.

더구나 기면병의 국내 치료 여건은 해외에 비해 더 악화되고 있다. 지난 2022년부터 국내에서 처방되고 있는 기면병 신약 '와킥스(성분명 피톨리산트)'는 올해 6월부터 국내에서 더는 처방받지 못한다. 와킥스는 프랑스 제약사 바이오프로젝트파마가 개발한 기면증치료제로 국내 유통은 미쓰비시다나베파마코리아가 맡고 있는데, 국내 와킥스 약가가 글로벌 시장 대비 지나치게 낮다는 이유로 제약사가 공급을 포기한 까닭이다.

이 대표는 "와킥스는 기존 기면병 약들과는 다른 유형의 방식으로 주간과다졸림과 탈력발작 2가지 증상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억제시킬 수 있는 약이다. 이 약은 기존의 기면병 약에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우들이나 약 부작용이 심해 와킥스밖에 쓸 수 없는 환우들에게 처방됐다"며 "이런 기면병 환우는 소수지만 와킥스의 국내 공급 중단으로 곧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로 약을 들여올 수밖에 없게 돼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기면병 환우가 희귀필수의약품센터를 통해 와킥스로 치료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은 뒤 약국에서 약을 타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해외에서 와킥스를 들여올 때 드는 운송료에 더해 관세, 부가세, 통관료 등도 약값과 같이 치러야 한다. 기면병으로 증상 조절이 쉽지 않은 환자들이 치료받기 더 힘든 환경으로 내몰린 것이다. 

이에 기면병환우협회가 와킥스 수입사인 미쓰비시다나베파마 관계자와 만나 이 사안에 대해 이야기도 나눠봤지만, 돌아온 말은 "본 회사에서 철수하겠다고 하니 수입사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한 대표는 "그나마  미쓰비시다나베파마에서 최대한 국내 기면병 환우들을 배려해 올해 5월 31일까지 국내서 와킥스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와킥스의 자진 허가가 취소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또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기면병 환자들에게 처방되고 있는 SK바이오팜의 기면병치료제 '솔리암페톨'은 아직 국내 도입돼 있지 않았다. 전문 의료진들은 국내 저가 약가 정책 때문에 국내사가 국내 약 도입을 늦추고 있다고 성토한다. 이한 대표는 "기면병은 완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각성제, 중추신경자극제 등 증상 완화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약물이 맞지 않거나 내성이 생기면 지금 국내에선 다른 선택지가 부족하다"고 짚었다.

이어 이 대표는 "어떤 기면병 환우는 기존 기면병 약제에 효과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지금 보다 기면병의 치료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며 "국내 기면병 환우들에게 꼭 필요하지만 곧 수입이 중단되는 치료제와, 우리나라에서 개발돼 해외에서 이미 판매 중인데 정작 한국에서는 발매가 안 되고 있는 치료제를 국내에서 기면병 환우들이 부담없이 처방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약들이 기면병 환우들에겐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기면병 환우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배려도 필요하다. 이한 대표는 "기면병은 증상 때문에 학교에서 환우들은 학업에 충실하기 힘들다. 능력이 있어도 기면병 환자라고 밝히면 취업하기 힘들다. 직장인 환우들은 근무태만으로 오해받고, 실제 해고당한 사례도 꽤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학교와 회사에서 환우들이 배려받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의 명문화가 필요하다"며 기면병 환우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