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없이 등 떠밀려 진학한 의과대학이었다. 1년 동안 나름대로 학교를 다닐 의미를 찾아봤지만 소용없었다. 일단 군대를 다녀와 다른 대학을 가기로 마음을 먹고 휴학을 하고 입영을 기다리는 동안 학교 근처의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했다. 함께 지내던 다른 과 친구들이 하나둘씩 입대를 했고, 늦가을이 되어 혼자 남은 나는 무작정 충북 음성에 있는 꽃동네를 찾아갔다.

걸인도 받아주는 곳이라는데, 사지 멀쩡하고 일 잘한다면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을까란 막연한 생각에 무작정 가방 하나 둘러메고 갔다. 입영은 서너 달 정도 후에나 한다고 하자 반가워했다. 며칠이나 몇 주 도우러 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한 달 이상 오래 머무는 사람이 부족한데 잘되었다며 나를 정신병동으로 안내해주었다.

여자 정신병동과 마주하고 있는 남자 정신병동은 4개의 층에 각각 150명가량의 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층에 배정되어 먼저 근무하던 다른 두 관리자와 근무하게 되었다. 나와 같은 관리자들은 각 층의 정중앙 양옆으로 창이 난 방에서 환자들을 감시하고 약을 관리하며, 낮에는 2명이 함께 근무하고 밤에는 1명씩 교대 근무를 했다. 입소된 환자들은 정신분열증, 조울증, 알코올중독, 다운증후군, 치매 등 병명이 다양했다. 감옥으로 친다면 나와 같은 봉사자는 간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알코올중독자들은 모범수 역할을 했다. 폭력적 성향이 적거나 도주의 위험이 적은 알코올중독 환자들을 데리고 개간이나 건물 공사, 수로 공사 등을 하러 나갔다. 냄새나고 좁은 병동 안에서 환자들과 실랑이를 하기보다는 밖으로 일을 나가는 것이 마음 편했지만, 간혹 도망간 환자를 찾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환자와의 차이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를 목에 걸고 있다는것뿐,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일을 하며 지내는 것에 지쳐갔다. 특히 사흘마다 야간 당직을 서는 날은 외로움과 고독감에 시간은 정지된 것 같았다. 마땅히 볼 만한 책도 없어 환자들의 수십, 수백 장에 이르는 병록(病錄)을 소설책 보듯 읽게 되었다. 그중 15살가량 된 기불(가명)이는 키도 아주 작고 왜소할 뿐 눈에 띄는 장애는 보이지 않았다. 마땅한 기록이나 병명도 없고, 먹는 약도 없이 몇 년째 이 병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자 모두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는 날이었다. 모든층의 환자들이 차례로 목욕을 하러 순서대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도주나 사고의 위험이 높아 긴장을 해야 한다. 힘 있는 사람들은 목욕도 금방 마치고 빨리 숙소로 돌아가지만 노약자들은 목욕도 천천히 하고 도와줘야 한다. 그렇게 남은 노인들만 목욕을 마치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 위를 돌아보니 기불이가 계단에 걸터앉아 노인들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넘어지는 할아버지들을 보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쫓아 올라가 기불이를 데리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잡은 내 손등을 할퀴고 물어뜯으려 해서 병동장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일단 독방에 가둬놓았다. 안에서 온갖 욕을 하며 발악을 했고, 넣어주는 밥도 집어던졌다. 병동장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도 숨어서 노인이나 정신지체장애인을 괴롭혀왔고 성폭행까지 해서 요주의 감시 대상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몰랐을까? 잠시 후 자연스럽게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병동장이 방에 들어가 무섭게 욕을 하며 몇 대 때리자, 이 녀석은 순한 양처럼 변해서 따라 나왔다. 평소에 이렇게 관리(?)를 해왔던 것이다.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기불이를 지켜봤다. 수사님을 통하여 기불이가 다른 보호시설에도 있었고, 꽃동네 안에서도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한 보육원에도 있었지만 심한 폭력성 때문에 결국 이 정신병동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측은한 마음에 틈틈이 말도 붙여보고 먹을 것도 주며 달래봤지만 언제나 기불이는 나를 보고 비웃거나 소름 짓는 뱀 같은 눈으로 째려볼 뿐이었다. 기불이의 취미 생활은 계속되었고 나를 한심한 듯 쳐다보는 병동장들의 시선과 충고 속에 나는 기불이를 한두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기불이의 나를 향한 적개심만큼 내 폭력 수위도 올라갔다. 나는 내 마음에 주문을 걸었다.

‘얘는 구제 불능이야,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때려서라도 버릇을 고쳐야 해’

급기야 나를 물어뜯는 기불이의 버릇을 고친다는 이유로 감정적 폭발을 한 나는 개 패듯 아이를 때리기까지 했다. 돌이켜보면 정신병동 관객들의 응원과 함성 속에 나는 투견장의 투견이 되었던 것이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다루는 많은 언론에서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사이코패스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는 유전적 경향이 아주 강하며, 어려서부터 충동 억제가 불가능하고 극한의 폭력성을 보이기 때문에 학교생활이나 사회 적응이 불가능하며, 대부분 고등학교 졸업도 불가능하기에 사회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반하여 사이코패스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양심이 결핍된 상태를 지칭하는 모호한 범죄심리학 분야의 용어다. 이는 집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지만, 운영하는 고아원의 원생들에게는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양심 불량인 사람을 포괄하는 것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사이코패스 진단 기준을 만든 범죄심리학자 로버트 D. 헤어는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snakes in suits)》란 책에서,‘ 직장에서 사이코패스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인재, 더 나아가 혜성같이 나타나 위험에 처한 조직을 구원해낼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들은 동료나 선배를 제치고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엘리트 사원이거나 촉망받는 임원후보인 경우가 많으며, 영국의 어느 조사에서 임원 승진 대상자 중 3.5 퍼센트가 사이코패스로 드러났다’고 했다. 나는 군포 연쇄살인범 강호순을 보면 꽃동네 기불이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내 안에 숨어 있는 사이코패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정신병동의 효율적 관리란 명분으로 나의 폭력을 합리화했던 것이고, 더욱더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거쳐 작은 양심의 소리마저 지워버렸다.

나는 정신병동이란 공간 내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사이코패스로 진화하는 중이었다. 그 뒤 몇몇 이유로 나는 군 입대 약속을 번복하고 복학했고, 꽃동네에서 있었던 부끄러운 기억들을 지우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이제야 17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입을 떼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본 한국 사회의 다양한 집단들 속에서 수많은 양심 불량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언제나 누구라도 양심 불량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공과 출세, 부를 거머쥐기 위해‘ 개같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정승같이’ 공평한 게임의 룰을 지키는 것은, 바보라고 비웃는 사회에서 양심 불량자 사이코패스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적응이 아닐까? 매일같이 언론을 장식하는 고위공직자 비리, 인사청문회에 서 드러나는 거짓말, 반복되는 과거 정권 측근들의 비리, 급기야 진보진영의 대표 단체에서 터진 성폭행 은폐 의혹을 보면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은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성향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못하지만, 너무 오염된 물에서는 괴물이 나온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괴물의 난립 속에서 웬만한 괴물은 괴물로 보이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 극히 희소한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일으키는 잔혹한 폭력과 살인은 영화에 나올 정도로 드물지만,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이기심과 자기 합리화의 정신기제(방어기제)가 만들어내는 양심 불량자, 사이코패스는 정의와 공평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기에 반성도 없는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 종교, 민족, 사상의 최면만큼 개인과 집단의 이성을 마취시키고, 그 안에 숨어이뤄진 자발적인 폭력만큼 잔인한 것이 있으랴!

모든 분야에 관행으로 이어지는 양심 불량을 폭탄 돌리기처럼 그때 그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이들이 그렇게 진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자리에 누가 앉든 비슷한 결과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쪽으로 담론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와 당신도 그들과 같은 진화를 하지 않고는 적응하며 살 수 없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작성자: 한정호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