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기에 찬 투사의 느낌이 없다. 배어져 나오는 말씀 하나하나는 그저 부드럽고 어떤 강인함이나 강요가 없다. 하지만 동양의 철학 속에 진보의 사상을 녹여 부드럽고 편안하게 담아내는 그의 말 속에는 깊이를 가늠치 못할 어떤 힘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가벼이 듣자면 상식수준의 할아버지 잔소리같이 엷기도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깊이를 쉬이 감지할 수 없는 심연이 느껴진다.

무언가를 알아가며 머리와 가슴에 생각을 쌓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사고와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의식의 왜곡과 물질을 바탕으로 한 이기의 생각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생각이 없다면 그 모습 그대로 왜곡된 의식 속에서 속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변화는 루쉰의 이야기처럼 철벽 속 몽환에 빠진 사람들을 두드려 깨우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시끄러웠다. 그들은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깨어난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큰소리로 외치며 따를 것을 주장한다.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면 그것이 마치 세상의 가장 바른 진리인양 고착화시켜 더 이상의 근본을 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에 진리란 존재했던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여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변화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던 시대에 그는 수많은 주장 이면의 근본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했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실천..  그리고 조언과 이야기들.. 그 모습은 너무도 유연하여 공권력마저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조언과 안식처와 마음의 힘이 되었다. 진보하되 조용하고 차분했다.  보이지 않는 뒤에서 어루만지고 감싸 안으며 세상의 변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마치 조용히 입을 다문 대인배의 모습 같기도 하다. 그리고 겸손하였다. 그 겸손이 글마저 남기려 하지 않아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접하기 어려워진 면도 없지 않지만, 겸손마저도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냈던 사상가였다.

노장사상과 진보철학,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종교사상이 그를 통해 하나로 통합이 되고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보는 그의 사상은 더 이상의 깊이를 만들 수 없는 근원의 사상이 아닐까.. 너무 깊고 근원적인 나머지 지금껏 '변절'이란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했던 김지하 시인에 대한 개인적 생각도 조금 달라진 듯 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김지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풀어놓지는 못한다. 그리고 주로 강연과 대담으로 엮은 이 책으로 선생님에 대한 생각과 족적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나의 게으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하나 만나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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