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촛불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 당시,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가담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에게 무거운 형량을 내리도록 외압을 행사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촛불에 적극 가담했던 입장으로서 정말 화나고 황당한 기분도 들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직업적 다행감이랄까요?  타인의 삶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는 판단에 인위적 기준만이 존재하고 외압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판사와는 달리, 의사는 생체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과 판단기준을 가지고 나름의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직업이다라는 그런 다행감이 들었습니다.  그런 다행감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용역과 나란히 하여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일방적 폭력을 휘두르는 공권력과 이를 비호하는 국가권력, 재벌가들에 대한 권력의 비호, 쉽게 납득하지 못할 판결들, 영도와 강정 등에서 보여주는 공권력들의 모습과 이에 비하여 공정치 못해 보이는 국가법의 적용행태를 바라보며, 나의 판단은 오로지 의학적 지식에만 기반하여 비교적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자 직업군 사이에서 개인적으로 나름 만족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은 의사라는 직업상 사회의 많은 현상들에 있어 비껴서는 듯 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판사는 정권이나 외압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엄정하고 공정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는 사회의 수많은 현상과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며 불의에 대항하는 이들의 법적 바탕을 형성해주며 힘의 원천이 되어주기도 하는데, 의사는 적극적인 힘과 지지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어떤 소외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몇몇 곳의 저항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들을 가보면 저항을 지지하는 법대교수들이나 변호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법적 토대를 마련해주고 이를 바탕으로 싸움의 밑그림을 그려주는 반면, 저는 멀뚱히 서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곤 했지요.  내가 앞장설 수 없다는 그런 아쉬움이 아니라 나도 가진 것으로 무언가 적극적인 도움이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함이 아쉬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람이 다치면 안 되는데 마치 다쳐야만 나의 역할이 찾아올 것 같은 그런 아이러니함도 느꼈고요.

솔직하게 말하면 의사들은 시야가 좁습니다.  대학생 때부터 전문의를 취득하기까지, 그리고 전임의를 거쳐 독립하기까지 의사들은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질만한 기회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쫓기는 듯 한 일상은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는 일이 아닌 이상, 다른 일에 대한 관심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죠.  그렇게 15-20년 가까이 생활하다보면 시야는 당연 좁아지게 마련입니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저 같은 의사들이 오히려 특이한 사람취급을 받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독립을 하게 되면, 특히 개원을 하게 되면 다시 사업이라는 성격이 강해지면서 제도경제권 안에서의 생존을 위해 쉼 없이 움직여야만 합니다.  이를 모든 의사들을 대상으로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으로 겪게 되는 의사들의 현실입니다.  이런 의사들이 사회에 관심을 가지기란 현실적으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더라도 좁은 시야는 넓어지지 못한 채, 의료 환경 안에서의 변화나 정책의 변화 또는 이권에 집중하게 되어서 의도와는 다르게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편향의 한국사회에서 역시 우편향된 위치에 서서 기득권의 주장에만 동조하게 되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종종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포털사이트의 토론방을 시작으로 해서 지금의 트윗까지.. 넓어진 오지랖은 제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제공해준 근원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의 주장이 옳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의 행동이 옳은데,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식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접하였던 많은 책들은 제가 느끼는 부채의식에 대한 지식과 사상적 바탕이 되어주었습니다.  의사는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을 오가며 부상자들을 치료해주는 인류애적 사랑과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을 일으킨 사회 안에 속해 있었으면서, 전쟁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 또한 존재합니다.  의사역시 사회의 변화 안에서 이방인이 아닌 적극 휘말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상처의 치료이전에 상처의 예방을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의사의 역할이자 사회참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직업적 특성상 시야를 넓히는 데에 있어 나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이상, 자신의 시야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고 넓혀가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런 작업은 나름 지식계층과 계급적 상층부에 존재하는 입장에서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에 부합하는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다고 제가 저항의 일선에 나서고 적극 가담하여 세상의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일개 소심한 의사이자 2차병원급에 취직한 봉직의 처지에서 환경과 사회변화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시간이 나면 종종 강정의 해군기지 반대현장에 들러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고, 후원하는 정도의 활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회과학에 관한 적극적인 독서를 하려 노력하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사들도 많습니다.  체 게바라나 노먼 베쑨같이 멀고 거창하게 가지 않아도, 정혜신 정신과 선생님은 쌍용차 투쟁이후 후유증으로 파괴되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가정에 직접 개입하여 정신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고, 인도주의 실천의사협의회 회원의사들은 투쟁의 현장 어디든 가서 적극적으로 상황을 살피고 의료적 조치를 행하고 계십니다.  영도로 가는 희망버스에는 의료봉사를 원하는 의사들이 탑승을 했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의료실현을 위해 의료생협이나 지역경제공동체에 속해 활동하는 의사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이렇게 제도시스템에 안착한 채로 글이나 끄적이며 있는 저는 얼마나 미숙한 모습인가요?

조심스레, 시선을 넓혀보기를 권합니다.  우리사회는 인간적 기본조건인 인문학적 상상력을 워낙 천시해서 교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사회의 근본을 성찰하는 기회나 능력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교육이후의 사회생활 역시 자본시스템의 톱니바퀴로 바쁘게만 굴려 다니느라 스스로 성찰의 기회도 가질 수가 없죠.  그래서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람들이 공통된 어떤 사회의식을 지니기란 무척 난해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성장을 위해 분배마저도 포기한 자본은 사람들은 벼랑 끝으로 몰아놓고 서서히 바닥을 끝자락부터 잘라나갑니다.  이에 사람들은 기본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현재 충남의 유성기업이고, 전주의 전북고속이고, 영도 한진의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고, 강정의 구럼비입니다.  사람들의 시작된 저항 앞에서 의사들의 역할을 스스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전쟁 중의 부상자를 돌볼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것인가 하는 고민..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 시야를 넓히고 고민을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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