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매의 눈으로 병동을 시찰하며 주말 신경외과 환자들의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나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최근 수술방 출입이 잦아지는 탓에 병동과 중환자실에 쏟는 관심이 자연스레 줄었다고 하나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레지던트 3년차와 필기왕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공인으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 한 병동 간호사의 임신과 결혼, 사직 소식을 뒤늦게 수술방에서 교수님을 통해 접했던 일을 계기로 그간에 무심했던 스스로를 한없이 자책한 바 있었지만 오늘 벌어진 사건만큼은 단순한 자책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환자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돌봄, 책임이 다시 한 번 요구되는 순간이었다.

본 사건은 오전 회진 정리를 마치고 돌아서는 찰나에 벌어졌다. 8년차 동갑내기 간호사였던 최양은 평소와 다름없이 차트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짜며 뭔가에 몰두해있었다.

평소 티격태격 거리며 지내는 사이지만 오늘만큼은 주말을 맞이하여 지난번 안면부에 발생했던 발진의 경과를 살펴주고자 가까이 다가섰다. 책상 앞에는 50mg 약물 한 병과 함께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바쁘게 계산하고 있었는데, 입으로 중얼거리며 한참을 매달렸지만 속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 중인 눈치였다.

학창시절에도 수학과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그 간호사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어떠한 문제인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채 십초도 되지 않아 나는 패닉에 휩싸이고 말았다.

'50mg 약 한 병 중 환자에게 12mg를 투여하고 싶은데, 가루 성분이기 때문에 생리 식염수를 5cc 혼합하여 액화 시켰다. 그럼 환자에게 12mg의 약을 투여하려면 몇 cc의 액화된 약이 필요할까?'

코싸인, 탄젠트 등이 나오는 삼각함수도 아니고 로그나 지수를 응용한 복잡한 계산이거나 미적분적 삼각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단순한 비례식만 세울 수 있다면 충분히 풀어낼 수 있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다니, 충격이었다.

초중고를 정상적으로 나온 사람이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물으니 오히려 허접한 오답을 말하며 바빠서 잘못 계산했다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런 단순한 계산조차 하지 못해서 어찌 너에게 내 오더를 믿고 맡길 수 있겠냐며, 네가 노티하는 환자 i/o(input 유입량/output 배설량)도 이제는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을 전했다.

계산 실수였다며 항변하는 최양에게 제발 이제는 그런 변명 따위는 지긋지긋하니 집어치우고 필기왕 출신인 나와 함께 차분히 문제를 풀어보자고 달랬다. 이것은 독자-저자, 의사-간호사의 문제를 떠나 동갑내기 친구로서 84년 쥐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임을 환기시키고, 이번 문제는 10이라는 숫자를 넘는 두 자리 수 방정식이기 때문에 이전에 최양이 계산할 때 흔히 사용하던 손가락, 발가락 스무 개 넘버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각인시켰다. 하얀 종이 위에 차분히 비례식의 개념부터 시작하여 문제풀이에 대한 해법을 함께 생각해봤다.

설명하는 내내 최양의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열띤 토론, 토의, 질의응답이 오갔고 지나가던 한 초등학생도 관심을 갖고 수업에 함께 참여했다. 한 사람이 열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열사람이 한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훨씬 효과적임을 강조하면서 다른 간호사들의 참여도 함께 독려했다.

다행스럽게도 삼십대 중반의 first nurse가 혀를 차며 '또 시작했구먼 쯧쯧' 하면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풀이의 말미에는 이해도 체크를 위한 필기시험 역시 치러졌다. 다행스럽게도 최양은 90점이라는 높은 성적으로 폴리클 스쿨 1기 강좌를 무사히 수료할 수 있었다.

레지던트 3년차 그리고 필기왕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성공적으로 실천된 것이었다. 그간에 병동에 무관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 재차 이런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학적 진단과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무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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