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아전인수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아닐까.  이는 보수기독교리가 절대적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기회주의성향이 가득한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속담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수없이 많이 적용되는 속담들은 제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상황에 직접적으로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만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리의 해석, 상황의 합리적 낙관 또는 비관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고 받아들여지지만, 문제는 그러한 일반적인 해석의 방식과 상황에 따른 선택의 조언은 언제나 사회적 기득권과 주도적 흐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보편타당하다 생각하는 사고들은 대부분 제도교육을 통한 습득과 일반적 사회관성에 물들어가며 공고화되는 형태로 규정화되었다.  그것을 달리 생각하려 하자면 개별적인 노력으로 따로 찾아보지 않는 한, 다른 생각의 기회조차도 접할 수 없다.  그렇게 자연스레 인식된 사고의 방식은 실은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자 그런 유지를 가능케하는 일반적인 생각의 흐름을 공고히 한다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서야 조금씩 깨달아간다.  

  작가는 그런 공고화된 사고의 흐름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넌지시 제기한다.  세상은 이야기가 지배한다고 믿는 작가답게, 그 방식은 우화를 통해서이다.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그림으로 작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하게 풀어나간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에 놓는다.  약하거나 또는 소수이기에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이들이 왜 부당한 소외를 받고 있는가, 또는 이들이 소외되는 과정은 어떠한가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너무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서 우화가 가지는 은유나 비유의 감칠맛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균열을 만드는 방식은 존중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어보인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실리기도 한 작품들이다.  한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긍정만을 심어주던 천사를 죽이는 노인의 모습에 항의가 많았다는 후문이었는데, 이유는 아이들이 보는 내용에 천사를 죽이는 장면이 가당하냐는 것이었다.  고난일 수 밖에 없는 삶에 무조건적인 긍정만을 심어주던 천사에 대한 분노가 과연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그 분노의 행위에 심어진 현실성은 과연 아이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었을까?  그보다도 더한 현실적 부정성이 이미 아이들의 눈에 노출되어 있는 세상에, 그런 이미지적 우화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은 역시나 공고화된 사고의 흐름 탓이다.  사람이 대를 이어 살아갈 만한 세상을 위해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증명하는 에피소드였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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