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대안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오늘날 시민권과 민주주의가 서있는 위치를 좀 더 충분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재미있는 책이다. 미국에서 어떻게 시민이 고객이 되어갔고, 탈정치화 되었는지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미국에서 일어난 정치 지형의 변화와 현재 한국의 현실이 무서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 역시 재미있는 주제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데자뷰를 경험했다. 전개 과정이나 구성 요소 자체에서는 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WHO나 대형 NGO들 역시 제삼세계에서 전개하는 많은 사업들에서 이처럼 민주적인 과정을 무시한채 빈곤층 주민들을 고객화 시키고 탈정치화 시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스와질랜드에 다녀와서 듣기 가장 민망하고 불편했던 것이 ‘좋은 일 하고 오셨네요’라는 말이다. 이 ‘좋은 일’이라는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있다. 이 ‘좋은 일’을 하는 단체들은 이타적이며 숭고하고 비영리성을 띄고 있으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다는 단어의 의미들을 충분히 활용한다. 실제로 이들이 빈곤층 주민들에게 해주는 일이 ‘최소한’에 불과하더라도 그 이상을 요구하거나 투쟁할 수 없도록 막아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람들은 이런 숭고한 일이 ‘정치적’인 것이 되는 순간 ‘타락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이 함의하고 있는 것들이 정치적인 것과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활동들은 ‘탈정치적’이다.

물론 정치라는 단어가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못하고 있지만 분명 이런 활동들은 정치적일 필요가 있다. 정치는 결국 갈등을 다루는 하나의 도구라 생각한다. 제삼세계의 많은 문제들은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적인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데서 오고 있다. 국내 정치에서야 국회 안에서 머리통 붙잡고 싸우는 것 정도나 떠오르지만, 세계 정치 지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 지금 수 많은 NGO들이 돕고자 하는 제삼세계 빈곤층 아니던가. 흔히 말하는 바닥 10억명(the bottom billion)을 조직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이뤄내야할 목표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해외 원조/지원 사업은 얼마나 민주적일까. 사실상 국가나 대형 NGO에 의한 지원은 지원을 받는 국가의 의견은 그리 반영되지 못한채 국외에서 결정된채 집행된다. 물론 사업이 집행되기 전에 해당 지역에서 의견을 묻고 설문조사, 타당성 검토 등은 이루어지겠지만 정작 의사결정권 자체는 가지지 못한다. 공여자는 ‘최소한’ 이 정도는 해준다며 합리화를 하고, 수여자는 ‘최소한’이라도 받지 못하게 될까 적절한 이의제기나 발언권 행사를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구조적으로 이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발언권을 얻거나 의사결정권에 참여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사이에 갈등을 중재해줄 만한 제도적 수단도 정치적 지형도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최소한에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갈등을 조직하고 더 많은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게 되면 처음에는 많은 단체들이 위협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처럼 주는대로 받으라는 식의 지원이 얼마만큼 장기적인 효과를 낼지 의문이다. 그런 한계를 넘기 위해 최근에는 시스템을 도입하거나 풀뿌리 사업 등을 지원해주고 있지만, 그 역시 지원해주는 쪽과 받는 쪽의 갈등 관계를 조정할 장치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그리 민주적이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없어 침묵하고 있는 것을 그저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업 진행의 정책 결정은 이를 받게 되는 제삼세계 주민들 개개인의 의견은 배제된채 주는 사람의 이익 - 주는 이는 이타적이라 생각하겠지만 - 에 따라 결정된다. 어쩌면 이렇게 정치적 참여의 과정이 묵살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지역 주민들은 정치참여에 관심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최근 정치 관련 책들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참 재미있는 도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치라는 도구는 인간 사회가 갈등을 다루기 위해 굉장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 보건의료나 제삼세계 지원 사업이나 진행하다보면 수 많은 갈등들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문화도 경제적 위치도 사상도 생활습관도 다른 사람들끼리 이익관계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 많은 갈등들을 단순히 정치가 거북살스럽다는 이유로 좋은 도구를 활용하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 이들이 잘 조직되어 정치라는 도구를 가지고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고 목소리를 내며 이익을 쟁취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것 아닌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책은 아니지만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하지만 대안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오늘날 시민권과 민주주의가 서있는 위치를 좀 더 충분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자신이 정치 따위와는 상관이 없다고, 그런 외풍에는 휩쓸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 역시 오늘날의 원조와 지원이 진정 어디에 서 있는지 더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 ‘좋은 일’이 현실에서 떨어져, 정치 같은 더러운 것들과 떨어져 지낼 수 있는 부분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생각을 시작하기에 좋은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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