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부터 입원해 있던 J씨가 상태가 좋지 않아 전에 입원했던 종합병원으로 구급차를 타고 갔다. 그는 만으로 68세다. 헌병 출신으로 뉴질랜드에 이민 간지가 오래되었다. 부산에 사는 동생을 만나러 왔다가 짧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 눕고 만 것이다. 월남 참전으로 고엽제 환자인지라 보훈병원에 입원했다가 어찌어찌하여 내가 일하는 요양병원의 독실을 차지하게 되었다. 진료의뢰서에 적힌 그의 병명은 만성 신장질환, 상세 불명의 만성콩팥 기능상실, 기타 명시된 말초혈관 질환, 당뇨, 허리 디스크, 통풍관절염, 뇌졸중, 고혈압, 오른쪽 엄지발가락 괴사 등이다.

환자의 상태가 요양병원에서 보기엔 버거워 보였지만, 병원관계자와 면도 있고 외국 국적이라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문제도 있어 내가 보게 되었다. 환자는 만성신부전증으로 복막투석을 뉴질랜드에서 하고 있는 중이었고, 비대한 몸집에 의식이 혼미하여 자불자불하였다. 그의 엄지발가락은 시꺼멓게 썩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혈당은 인슐린주사로 조절하는데도 떨어질 줄을 몰랐고, 내게 불면증과 변비를 호소했다.

그렇게 한 달 여를 버티던 그의 상태가 나빠졌다. 혈압이 떨어지고 숨은 가빠지고 의식은 혼미해져가고 산소포화도도 떨어지면서 맥박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보호자인 딸에게 연락했다. 아버님의 상태를 설명하고,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런 상태로는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 같은데, 좀 더 적극적인 치료를 하려면 급성기 환자를 보는 종합병원으로 모시고 가야한다고 말했다. 딸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환자의 동생이 올 때까지 나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기까지 죽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수액을 달고, 승압제를 투여하고, 산소호흡기를 달면서 모니터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동공에 빛을 비추어보고, 청진기로 심장 박동 소리와 숨소리를 들어보면서 수시로 상태의 변화를 딸에게 이야기하면서 구급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금은 사순시기다. 지난 주일에 성당에서 사순 2주일 미사를 보았다. 가톨릭신자들은 사순시기에 육체적 극기와 단식을 통한 참회의 생활을 한다. 예수님의 수난, 고통, 그리고 죽음을 묵상하고 그 여정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꼭 사순시기라서가 아니라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일상적으로 죽음에 자주 접하게 되니까 요즘은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또 삶이란 무엇인지.



며칠 전에 읽은 책이 있다. DEATH<죽음이란 무엇인가>(셀리 케이건, 엘도라도,2012)란 무시한 제목의 책이다. ‘열린예일강좌(Open Yale Course)'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저자가 예일대학교에서 진행해온 죽음에 대한 강의를 뼈대로 만든 책이다. 전반부는 영혼, 죽음의 본질, 영생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다루고 후반부는 가치의 문제와 자살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저자도 밝혔듯이 이 책은 철학책이다. 유대교도인 저자는 죽음이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최대한 이성적인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접근하면서 가능한 한 합리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죽음의 본질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한다. 죽음의 본질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의 허구를 저자는 하나하나 지루할 정도로 파헤친다. 일반적인 견해란 이런 것들이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옮겨보면 이렇다.

우리는 영혼을 갖고 있다. 즉, 인간은 육체 이상의 존재다. 살과 뼈로만 이뤄진 존재는 아니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일부, 특히 본질적인 일부는 육체를 초월한 영적, 비물질적 존재다. 그런 존재가 바로 영혼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물질적 존재인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 다른 일반적인 견해로, 인간은 비물질적인 영혼을 갖고 있으므로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죽음은 우리의 육체를 파괴하지만 영혼은 육체를 초월한 존재이므로,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죽음은 결국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를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많은 사람들은 영혼이 정말로 존재하기를 소망한다. 그래야만 영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죽음은 나쁘고 무서운 것이므로 사람들은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란다. 영생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런 영생은 영혼이 있어야 가능하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우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영혼을 원한다. 하지만 그런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면,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공포와 절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정 삶은 축복이고 죽음은 두려운 것이라면, 그런 삶을 스스로 저버리는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살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죽음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견해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저자는 철저한 물리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한다. 영혼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그 기계는 아주 복잡하고 고도의 사고와 사랑까지 할 수 있는 특별한 기계다. 고장이 나서 그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나고, 영혼도 사라진다. 영혼이 따로 없으니 영생도 있을 수 없다. 나아가서 저자는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살도 바람직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독자들이 동의해주기를 바라지만, 독자 스스로 죽음을 직시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한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나아가 두려움과 환상에서 벗어나 죽음과 직접 대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다시 사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그가 죽었는지 아직 살아있는지 알 지 못한다. 나에게 설이라면서 뉴질랜드에서 가지고 온 오메가3 한통을 건네주던 딸의 고운 인상과 따듯한 마음과 예쁜 손을 기억할 뿐이다. 나에게 그녀가 찾아온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란 책을 선물하고 싶다. 삶과 죽음은 신비이고, 동시에 축복이라는 생각도 든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돈다./플라치도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