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해운대경찰서는 8일 세계교회연합회(WCC) 부산총회를 방해하기 위해 폭발물 설치 허위신고를 한 혐의(공무집행방해)로 WCC 반대집회 참가자 강 모(29)씨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강씨 등은 지난 달 29일 오전 9시 30분께 부산 해운대구 중동 한 공중전화부스에서 총회행사를 방해하기 위해 112에 전화를 해 “과격분자로 보이는 사람이 WCC 행사장인 벡스코에 폭발물을 설치한다고 말했다”며 허위신고를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신고로 당시 경찰과 군인 64명이 벡스코에 출동해 수색작업을 벌였다. (11월 8일자 부산일보)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제 10차 부산 총회가 지난 달 30일 개막해 이 달 8일까지 열흘 간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렸다. 기독교인은 물론 타종교인들까지 참여해 정의와 평화를 주제로 화합의 장이 마련됐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WCC 부산 총회는 행사기간 동안 역대최대 규모인 세계 110개국, 349개 교파와 교단, 5억6000만 명의 회원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 8500여명이 모여 예배를 하고 평화와 정의를 주제로 한 토론을 펼쳤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레이마 보위 아프리카 평화재단 대표, 조셉 마르 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 로마가톨릭 쿠르트 코흐 추기경, 프랑스 떼제 공동체 대표 알로이스 로제 신부, 영국성공회 저스틴 웰비 대주교 등 세계적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1948년 창립된 뒤 140개국 349개 개신교 교단과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WCC는 7년에 한 차례 총회를 열고 개신교의 시대적 과제와 신학적 방향을 논의해 오고 있다고 전한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가 WCC에 가입해 있다.


벡스코는 직장을 오가며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는 곳이다. 하루는 지하철 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데 봉고차에서 소음이 들려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발을 헛디딜 뻔했다. 간이 떨어질 뻔했다.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으이구, 저 화상들~’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신호에 걸린 봉고차의 확성기에서는 분명 80db 이상의 소음으로 연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도돌이표 형식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아, 이건 아니잖아!


폐막일 아침 출근길에서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통성기도 소리로 시끄럽다. 벡스코 앞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두 팔을 벌려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WCC는 악마며, 사탄이라는 푯말을 들고서. 예수 믿는다는 자들이 아침부터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참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보기 어려운 무리들이다. 아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소속 사람들일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사진을 반사적으로 찍었다. 통성기도보다는 묵언이나 묵상에 현대인들이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도는 안으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든 부처든 마호메트든 절대자와 일대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이 아닐까?




에큐메니칼. 내가 이 말의 뜻을 안 것은 1982년이었다. 당시 영어의 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넣어 준 <하나인 믿음>(분도출판사,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외 지음)이라는 600쪽이 넘는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교회들 간의 일치와 연합을 목표로 시작된 에큐메니칼 운동. 다양한 교단과 교파들(개신교는 어찌 그리 파가 많은지?)들이 서로 나뉘어져 분쟁과 경쟁, 갈등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선교에 걸림돌이 된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총회 메시지를 ‘모두 함께 나아가자’(We intend to move together)로 정하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에게 ‘정의와 평화로의 순례’(Join the Pilgrimage of Justice and Peace)를 요청했다. 내가 <하나인 믿음>에서 배운 것은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말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른 바 ‘묻지 마 신앙’이요 ‘묻지 마 투표’다. 내가 보기엔 성경을 행간이 아닌 글 자체에 집착하는 문자주의의 폐해다.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모르는 소치다. 예수의 돌아가심과 부활만 말한다. 그것도 글 감옥에 갇힌 상태로.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정신)은 사람을 살린다.’(고린도후서 3:6)고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강력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 있다. <예수는 없다>(오강남, 현암사, 2003) 맹목적인 성경읽기는 맹목적인 신앙을 낳기 마련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형태로 나타나는 ‘묻지 마 신앙’이 그것이리라. 교회는 기득권을 강화한다. 교인들은 돈키호테처럼 십자군을 자처한다. 주일이면 십일조와 건축헌금을 꼬박꼬박 내는 것이 ‘범생이’ 교인이다. 그러니 ‘십알단’을 조직해서 댓글 알바 짓거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 권위주의 목사들에게 입도 벙끗하지 못한다. 성경을 바르게 읽으려하지 않고, 예수의 행적을 본받으려 하지 않으니 예수를 닮아 가기가 요원하다. 묻지 마 투표는 삶을 곤궁하게 하지만, 묻지 마 신앙은 영혼을 마비시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양성 속의 일치.

배타적이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손을 잡고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일이다.

배타성. 참 무서운 말이다. 배타성으로 무장된 사람들은 소통과 공유가 들어 설 자리는 바늘귀만큼도 없다. 우리나라는 불교신자와 그리스도교인을 합하면 국민의 절반을 넘지 않을까. 그리스도교 중에서 개신교의 배타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가 다르지 않을텐데 상극이다. 물과 기름이다. 예수도 부처도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힐 것 같다. 무엇을 위한 종교인지 모를 지경이다. 고통과 위기의 현대사회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과 자비가 나눔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종교의 역할이 아닐까. 그래서 종교 간의 화합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더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소음 수준의 고성방가와 안하무인격으로 대로에서 하는 통성기도는 절망을 넘어 측은하다 못해 일본의 극우파들처럼 혐오스럽다. 결국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문제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어찌 한국의 정치판과 꼭 닮았는지. 남북과 동서 간의 화합을 말하면서 분열을 조장하고 오히려 즐기기까지 하는 꼴이란! 남을 비방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일이다. 그리하여 나의 때를 벗기고도 남는 힘이 있다면 남의 등도 밀어주자. 이런 게 사람의 길이리라. 진리고 생명이 아닐까? /플라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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