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이 말한 시대마다의 고유한 질병, 지금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고유의 질병은 긍정성에서 기인한다.  명백한 대상이 없이 자신이 자신을 단련하고 착취하는 구조에서 우리는 맹렬하게 굴러간다.  긍정이라는 명목하에 스스로를 끝이 분명하지 않은 트랙 위에서 굴리다보면 결국 피로감만 유발된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무엇이 우리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지 복잡하고 막연한 구조는 그 실체나 이유를 좀체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막연함은 불안과 초조로 개인을 잠식한다.  잠식된 개인은 피로감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멈출수도 없다.  과감히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다간 다른 경쟁상대들의 멀어진 뒷모습만 보게 될까봐 두렵다.  

끊임없이 자신을 굴리는 개인들은 사실 하나의 구조안에서 공존한다.  구조 안에서 개인들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의 소스와 연결된 채,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안에서 살아간다.  정보의 홍수 안에서 개인은 '긍정의 착취'를 수월하게 이어나가고, 주변의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려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구조안의 삶은 좀 독특한 데가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맹렬하게 서로간에 접속을 하면서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통제한다.  개인의 노출은 가히 포르노적이며 포르노적인 정보들이 거미줄처럼 사람들을 엮으면서 어딘지 모를 불분명한 지향점을 형성한다.  개개인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면서 일종의 파놉티콘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일관된 통제가 없는 서로가 서로를 통제하는 특이한 파놉티콘,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착취하는 개인들이 모여 가감없는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며 관계를 형성함으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지만, 그 구조의 모양이나 지향점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채 부지불식간에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착취해가는 개인'이 모인 관계를 생각해본다.  성장은 서로간의 교류를 통한 자극으로 외적 성향을 띄며 이루어진다 할 때, 자신이 자신을 관리하는 개인의 교류는 가히 내적이다.  '성장'은 안으로 수렴하며 개개인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경계를 형성한다.  내적으로 형성된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며, 그렇게 형성된 개인을 둘러싼 벽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표출되는 표현은 타인의 마음까지 도달하기엔 숙성되지 못한 날 것 그대로의 이질적 모습이다.  관계는 미숙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방식으로만 타인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관계라 말한다.  결국 관계는 이런 의미로 변질되었다.  주어진 정보를 서로 공유하는 것을 관계라 부르고, 맹렬하게 타인과 접속하고 교류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표현은 결국 배설이 되고 마는 것, 자가착취의 피로감을 어떤 형태로든 타인 앞에서 내비치며 알아주기를 바라기만 하는 미숙함 말이다.  단단한 벽에 둘러싸인 채, 방향성없고 숙성되지 않은 자기표현의 발산은 그대로 벽 밖의 공공의 공간안에서 휘발된다. 표현의 피드백이 없거나 변질된 세상에서 개인은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도 외롭거나 상처받을 수밖에 없다.    


사적인 경험이 공적인 언어로 전환되지 못하고, 자가착취의 결과로 축적된 개인적 자산의 집합이 뒤따라오는 이들에게 참조되지 못하고 교감되지 못하는 현실상황은, 수없이 많은 관계와 정보 속에서 우리는 왜 공감하지 못한 채 외롭고 힘들기만 한가라는 의문에 대한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왜 그러는가에 대해 이 책은 차분하게 설명해준다.
그리고 누군가의 곁에서 '타인' 또는 '너'의 존재를 의식하기를 주문한다.  내부로 수렴하며 안도하는 '편'이 아닌 외부의 누군가를 인식하게 하는 '곁'은 자각과 피드백을 통한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투명사회, 그리고 엄기호의 단속사회에서 이런 시도는 어렵기만 할 지 모른다.  우리는 관계의 형성과 회복이라는 개념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많다.  따라서 구조의 좀 더 깊은 속내를 바라보고 구조를 형성하는 다양한 정치사회경제적 실질요소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내용에 크게 공감하며 읽으면서도 조금은 아쉽다 느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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