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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떠나기, 그리고 저장강박증(hoader)




노교수님 한 분이 은퇴하심에 따라 방 재배치 도미노가 시작되었는데, 그 나비효과가 어느새 나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방을 옮겨야 하는데, 15년 넘게 사용하던 방이라 짐 정리가 만만치 않을터..

마침 이번 주말이 연휴라서, 그 틈을 타 미리 짐 정리를 시작하였다.


시작하여보니.. 지난 15년간 참으로 entropy 를 많이도 쌓아놓고 있었다는 걸 새삼 절감하였다. 2002 월드컵 열리기도 전에 읽었던 논문 복사본들은 기본이고.. 이미 개정을 세번 이상 한 교과서도 그냥 그대로 처박혀 있었고..
학회 갔다가 무심코 집어온 볼펜 등의 잡동사니들도 10년 이상 내 엔트로피 더미에 묻혀 있었고.. 이쯤 되면 각 물건들마다 요괴로 변할 법도 할 것 같았다.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책꽂이 하나는 모두 열칸을 가지고 있는데, 책들을 과감히 버리고 나니 겨우 반칸 정도의 책들만 남기게 되더라..


이 엔트로피들을 그동안 왜 나는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게으름? - 일부는 맞다고 본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소위 hoader 라고 불리는 저장강박증 경향도 비교적 경도로 갖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거 지금은 안 쓰거나 안 보지만, 언젠가는..' 하는 쓸데없는 미련으로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다보니 말이지..
문득 주변을 보니, 내 room-mate 도 만만치 않다. 내 옆방의 교수들도, 또 그 옆방의 교수들도...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정도는 저장강박증을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결국은 15년간을 써도 책꽂이로 반칸 정도, 서랍으로 두개 정도만 남기면 충분한 것을..


사소한 일상 생활에서 좀 지나치게 비약하는 감이 있지만, 우리네 인생을 하직하게 되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한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


참으로 쉬운듯 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집착'을 버릴 수 있을 때 '해탈'이 온다는 걸 법정 스님이 일찌기 설파하셨나 보다.

사족: 저장강박증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사실 좀 지나친 어휘이긴 하다. 질병으로서의 저장강박증이 되려면 심지어는 쓰레기까지 못 버리고 갖고 있어야 하니까. 아무리 의사들이 하나같이 강박증이 심하고, 방마다 엔트로피가 잔뜩 쌓여 있지만, 쓰레기도 모아 놓는 그런 경지까지 보이는 이는 단 한명도 없거든.

사족2: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참으로 많이도 버렸다. 오늘 마음 단단히 먹고 매몰차게 버리고 또 버린 결과다. 그러고나니 속은 시원한데.. 미화부 여사님들께서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다. 내일 만나면 자판기 커피라도 빼 드려야겠다. 정말 미안하거든..

사족3: 어휴.. 그런데, 버리는 것에 쏟는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그냥 버리는게 아니고 취사선택, 선별 등의 정신 노동(?)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육체 노동 못지 않게 칼로리 소모가 엄청난 것 같다. 약 4~5시간 정도 걸렸는데, 오늘 집에 와서 그냥 뻗어버렸다.
 

유진홍  jhyoo@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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