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284쪽/다다서재/12,600원

어쩌면 건강한 내가 당신보다 먼저 교통사고로 죽게 될지도 몰라요.”

마흔을 갓 넘은 나이에 유방암 다발성 전이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주변을 정리하고 예정된 강연을 취소하려 한다. 그러자 강연의 주최자인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가 그를 만류하며 한 말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도 기약 없는 약속을 하는 인간의 운명적 딜레마를 목도한 철학자는 죽음의 준비를 멈춘다. 그리고 점점 사라져 가는 자신의 몸과 다가올 죽음을 소재로 삼아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우연을 주제로 의료인류학자에게 서신 교환을 제안한다.

신간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말기 암으로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의료인류학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오랫동안 임상 현장을 조사하며 질병과 죽음, 확률과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온 의료인류학자 이소노 마호와 평생 우연에 천착해온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는 철학적 주제인 우연을 통해 질병이라는 실체적 문제를 사유한다.

두 여성학자는 스무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간에게 우연히 찾아드는 만남과 질병, 반드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이별과 죽음, 나아가 죽음이라는 정해진 운명 앞에서도 계속되는 인간 삶에 대해 근원적인 화두를 던진다.

이 책은 질병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부족한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를 짚어낸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과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하다 떠난 젊은 철학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두 여성 학자가 삶과 죽음, 추상과 구체를 오가며 서로에게 던지는 묵직한 화두는 그동안 질병과 죽음을 대하던 방식을 의심하게 한다.

숫자에 근거해 미래를 예측하는 합리적 사고가 과연 우리 삶을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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