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죽음이 만나자고 했다/260쪽/웅진지식하우스/15,000원

의사도 우울증에 걸릴까?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의사도 사람일까?’처럼 어리석은 질문이다. 의사가 우울증에 걸릴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서울대 나온 의사가 우울할 일이 뭐가 있니?” 이것이 의사 정상훈에게 쏟아진 질문이었다. 날카로우면서도 강직한 눈매,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발음과 중후한 목소리, 꼿꼿한 자세와 절제된 몸짓, 그는 우울증 환자의 이미지와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죽음을 떠올리게 됐다. 이유도 모른 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죽음의 부름에 응답하기로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죽음이 만연한 아르메니아레바논시에라리온의 세 나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은 시작됐다.

처음 도착한 나라는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이 들끓는 아르메니아였다. 환자를 구하러 간 그곳에서 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아이러니하게도 환자에게 치료 실패를 통보하는 것이었다. 치료 실패란 암 같은 위중한 질병을 앓고 있어서 치료 효과가 없는 환자들의 치료를 중지하는 것이다.

의료 자원이 부족한 가난한 나라의 의사 앞에 놓인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 밑바닥 죽음들을 마주한다. 생계 때문에 결핵을 치료하지 못한 채 이주노동을 떠나는 노동자, 가부장 사회의 시선이 두려워 치료를 포기한 아기 엄마, 돈 벌러 떠난 아들을 기다리다 끝내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국가에 평생 헌신한 군인의 임종 전 고통조차 방치하는 나라.

치료 중단, 치료 실패와 싸우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가 마주한 것은 죽음이라는 가면을 쓴 불평등한 세계의 민낯이었다.

이어서 그는 시리아 난민이 흘러들어 내전의 화염에 휩싸인 전쟁터 한복판으로 향했다.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총격전을 벌이는 레바논을 그는 갈라진 세계라고 부른다. 지독한 위생 상태로 굶주리는 난민들, 고작 20인 열두 살 아이, 총탄이 몸을 관통한 환자들.

갈라진 틈새로 서로에게 비난과 침묵을 쏘아대는 세계에서, 저자는 때로 무력감을 느끼고 때로 분노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 나는 정말 살리고 있는가.’ 타인을 진정으로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그가 끝으로 향한 곳은 죽음의 병으로 불리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프리카 서쪽 끝 시에라리온이었다. 치사율이 90%까지 치솟았던 이 전염병은 백신도 치료약도 없었다. 식구 모두가 한방살이를 하고 천막을 세워 병원으로 쓰는 이곳에서는 거리 두기조차 요원했다.

환자 격리와 수액 처방이 의료 행위의 전부인 현실 속에서 저자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 앞에 무거운 마음으로 섰다. 자신을 엉클이라고 부르며 애타게 찾는 소년과 에볼라에 걸린 두 살배기 아이를 치료하는 동안, 그는 단 하나만 떠올렸다. 바로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한때 죽음으로 가득했던 그의 마음은 이제 끊임없이 환자가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외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레바논시에라리온에서 저자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로 신음하는 세계의 반쪽과 마주한다.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살릴 수 없는 애타는 현실 앞에서 그는 각각의 환자들이 가진 아픔과 가난을 쉽게 연민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아픔의 다양한 얼굴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살피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예민하고 집요하게 살폈다. 저자의 깊은 고민과 성찰은 타인을 향한 피상적인 연민이 얼마나 위험한지, 과연 쉬이 연민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우리에게 날카로운 물음을 던진다.

우울증을 앓던 때 저자는 분노슬픔의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고 고백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로 치료를 포기하고 거부한 환자들, 의료 시스템과 자원의 부족으로 치료에 실패한 환자를 맞닥뜨리며 쉽게 분노하고 깊은 무력감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다양한 아픔의 얼굴들을 가슴에 묻고 난 후, 그는 비로소 쉬이 분노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지지 않게 됐다. 의사 한 명이 환자를, 그리고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는 자책감 때문에 죽음 앞에서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지구 반대편에서 혈혈단신이라 여겼던 그 자신도 이미 혼자가 아니었다. 동료 의료진을 믿고 의지하는 뜨거운 동료애, 내면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차가운 의연함, 애증의 대상이었던 엄마의 아픔조차 껴안을 수 있는 강인한 용기가 자신 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이 책에는 아들인 한 인간과, 친밀한 적()으로서의 어머니 이야기가 저자의 긴급구호활동 경험과 평행우주처럼 장면을 교차하며 그려진다. 부모의 갈등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엄마의 기대로부터 도망치고 감정을 피했던 청년 시절, 그리고 성장을 거부하며 지내온 마음속 어린아이가 변화해나가는 가족 로망스가 빈곤과 내전과 바이러스와의 전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저자는 자신의 아픔(우울증)에서 시작해 세계의 수많은 아픔을 만난 뒤, 마침내 엄마의 아픔을 껴안게 되는 내면의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리얼리티를 더한다. 이제 이 책을 마주한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답을 찾아갈 시간이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당신은 살아갈 이유를 찾아냈는가?

저자 정상훈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의료관리학교실 전공의로 재직했다. 돈 잘 버는 의사보다 세상을 고치는 의사가 되고자 의료인 단체 ‘행동하는의사회’를 창립해 남다른 의사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우울증’이라는 병이었다. 그는 운명 앞에 좌절했고 세상을 피해 자기 안으로 깊이 침잠했다. 2년에 걸쳐 우울증에서 회복한 후,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 해외구호활동가으로 지구 반대편 가난한 나라들로 향했다. 서아시아 빈곤국인 아르메니아에서 에이즈보다 무섭다는 ‘다재내성 결핵’ 환자들을 치료했고, 내전이 한창이던 레바논에서 시리아 난민을 위한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더 멀리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 ‘죽음의 병’이라 불리며 치사율이 50~90%까지 치솟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또다시 죽음이 만연한 그곳으로 가 긴급구호활동을 펼쳤다. 이 일로 ‘한국인 최초의 에볼라 의사’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는 자주 부끄럽다고 말한다. 자신은 시에라리온에 파견된 700번째 의료인일 뿐이라고, 살린 사람보다 살리지 못한 환자가 더 많다고. 이 긴 여정을 마치고 세계의 가장 밑바닥 삶과 죽음을 껴안은 그가 집으로 돌아와 삶의 이유와 존재의 의미를 문자 안에 담았다. 지금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방방곡곡 의료 현장에서 ‘동네 의사’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동네의사의 기본소득》(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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