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288쪽/궁리출판/13,000원

분자생물학은 박테리아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체의 미시구조가 놀랍게 단조롭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을 비롯한 생물의 몸은 단백질로 이뤄져 있고, 단백질을 구성하는 20종의 아미노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온갖 기기묘묘한 동식물의 모습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곧 생명체가 보여주는 거시구조의 엄청난 다양성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가?

1965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모노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라는 생물학의 오랜 수수께끼를 미시세계의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초월적 존재가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생명을 창조했다고 믿었다.

또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혼을 갖고 있어 그 자체로 생동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노에 따르면 생명의 출현은 분자적 차원의 미시세계에서 우연히 일어난 요란(변이)’의 결과일 뿐이다.

모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진화는 생명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살아 있지 않은 무생물과 다르게, 모든 생물은 종의 보존과 증식이라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생명체의 특이성은 변화(진화)의 추구와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에 저항하는 능력, 즉 세대를 거치면서도 불변적으로 자기의 구조를 복제해갈 수 있는 그 둔감의 능력에 있다. 변화에 저항하는 불변적인 자기복제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을 이룬다.

생명체의 변화, 진화는 생명체의 본질이 실현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불변적인 자기복제의 실현이 생명체의 본질이다. 진화는 이 불변적인 자기복제의 실현이 우연적인 요란에 의해 방해받아 실패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진화는 생명체의 본질 속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연적 속성일 따름이다.

일단 DNA 구조에 새겨지고 난 다음에 이 우연적 사건들은 기계적으로 충실하게 복제되고 번역된다. 즉 증식되고 전파되어 수백만, 수천만의 동일한 복제가 생겨난다. 순전한 우연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필연의 세계로, 가차 없는 확실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이 거시세계의 필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의지해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길바닥의 돌멩이와는 다르게 필연적인 이유에 의해 존재하기를 바란다. 우리란 존재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기를 바란다.

과학은 어떤가?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원인에 따른 결과가 단일하고 예측 가능하다는 결정론적 세계관17세기 과학혁명 이후 과학계의 주류를 이끌어왔다.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이 우주에 우연성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그래서 유전자의 분자생물학적 분석으로 인류의 출현이 우연적 사건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모노의 저작은 1970년 출간 당시 열렬한 호응과 더불어 격렬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진화의 원천은 모노에게 물질의 미시적 차원인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우연적 요란들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의 지배로 인해 어떻게 일어날지 본질적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 요란에 있다.

인간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우주와 인간의 역사는 모노에게 많은 종교철학적 체계가 설명하듯(이를테면 마르크스나 헤겔이 생각하듯) 어떤 필연적인 계획에 따라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 자체에 내재한 우연성과 필연성을 규명하는 모노의 논의가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요청에까지 이르는 과정이 자연스러운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노가 비판하는 물활론적 윤리란 외부로부터 인간에게 부과되는 윤리다. 과학은 신의 영광을 표현하거나, 마르크스나 헤겔이 한 것처럼 그들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수단이 된다. 모노는 우리에게 신적 권위라든가 역사의 과학적 법칙과 같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개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내적 정합성을 갖는 진정한 과학(지식)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모노는 단순히 현대 생물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분자생물학의 기본 지식을 철학종교정치윤리문화 등 다른 사유의 영역으로 발전시켜나간다. 과학을 단지 기술적으로 중요한 지식이 아닌 인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식으로 보고자 한다. 진정한 과학의 힘을 근본적으로 묻는 책이다. 인류 사상사의 진로를 개척한 고전으로 그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저자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

프랑스의 저명한 분자생물학자다. 파리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1941년에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년에 파스퇴르연구소에 들어간 뒤, 앙드레 르보프가 주재하는 미생물 생리연구실에서 대장균의 적응효소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후 1954년에 세포생화학 분과를 개설해 과를 이끌었다.

1961년에는 프랑수아 자코브와 공동으로 효소의 유전적 조절작용에 대해 연구했다. 1965년 르보프, 자코브와 함께 효소와 바이러스 합성의 유전적 조절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71년 파스퇴르 연구소장을 맡았다. 파리대학과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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